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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Aug 13. 2018

먼저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

못난 '쫀심'에 지지 않기


요 며칠 어깨가 말썽이다. 딱딱하게 뭉치고 팔이 저려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파스도 붙이고 스트레칭으로 이완시켜도 보지만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다. 아이들의 밤잠은 남편에게 맡기고 마사지샵으로 차를 몬다. 마사지 받는게 대체 얼마만인지. 



"30대 이후부턴 마사지 힘으로 살아야 돼"


회사에 다니던 당시 30대 중반의 PD 선배가 한 말이 뇌리를 스친다. 아이도 없던 미혼의 그녀주기적으로 마사지를 받으며 바닥난 기력을 회복하곤 했다. 하물며 펄펄 뛰는 두 아이를 키우는 30대 중반의 아줌마인 내가 당시의 그녀보다 뭉치면 더 뭉쳤으련만, 나 혼자만을 위한 소비는 갈수록 망설여진다. 이렇게 고장이라도 나야 겨우 정비를 하는 것처럼.






깊은 밤에 혼자 운전하는 것도 간만이다. 일부러 연애할 때 가끔 가던 마사지샵으로 향한다. 조금은 거리가 있어 결혼 후에는 거의 가본 적이 없다. 집 근처에 있는 중국식 마사지 체인보다 약간 비싸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대단한 사치라도 하는 양 죄책감이 들 것 같은 곳이다. 오랜만의 방문인데도 아로마 오일 향기가 익숙한 듯 코끝에 스민다.


엎드려 누운 베드의 뚫린 구멍 아래로 테라피스트의 두 발이 보인다. 내 뭉친 어깨를 꾹꾹 누를 때마다 그녀의 양쪽 발가락이 잔뜩 오므려진다. 온 힘을 다해 혈을 찾아 누르는 가녀린 20대 여성. 새삼스레 미안하다. 내 몸 풀어주려다 잔뜩 뭉칠지 모를 저 사람의 작은 체구.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기를 나에게 나누어 준다.


마사지 받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언제나 그러하듯 싸움은 그닥 큰 계기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별 뜻 없이 한 사소한 행동은 예상치 못한 파란을 일으키곤 한다.



오늘 아침부터 살배기 둘째가 한껏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자 고집을 부리고 떼를 썼다. 이리 달래고 저리 어르며 나름대로 훈육을 하다 덩달아 약이 오른 나는 아이의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았다. 그 순간.


"!"


나를 향해 외치는 남편의 외마디 고함이 집안 전체의 공기를 진동시켜 내 귓속 고막에 다다랐다.


" 애를 때려?"


사실 꿀밤을 때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난 알았다. 내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걸.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력으로 아이를 굴복시키려 하는 건 좀더 신사적인 방식으로 아이를 통제할 자신이 없는 부모의 비겁함이라는 걸.


하지만 내가 진행하던 훈육에 참견을 한 남편이 미웠고, 평소엔 대수롭지 않았던 '야'라는 호칭도 새삼 거슬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 앞에서 감정 절제에 실패한 나의 치부를 들킨 것 같아 몹시 창피했다.  


수치스러움은 이내 오기로 발현됐다.


"왜? 저렇게 말 안 듣는 애 훈육하면서 꿀밤 하나  한 게 그렇게 잘못됐어?"



사실 남편에게는 그 한 방의 꿀밤이 '콩-'이든 '쾅-'이든 '우지끈-'이든 그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이나마 아이를 육체의 힘으로 다스리려 한 나의 저열함을 향한 역정이었다.





노곤하다.

고단했던 육신이 차츰 풀리는 동안 얼기설기 뒤섞여 있던 나의 영혼 역시 아로마 향기에 취해 조금은 말랑해진다. 행여 투닥거리면 냉전의 불편함이 싫어 대부분 먼저 분위기를 풀어주던 남편의 노력이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일까.


연애시절부터 지금껏 나에겐 늘 관대했던 그다. 반면에 난 늘 '먼저' 사과하는 것엔 인색했다. 오늘도 명백한 나의 실수에 되려 화를 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이들한테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나오던 '미안해' 소리가 내가 사랑하는 평생의 반려자에겐 그렇게 어렵다니.


마사지 베드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던 시간동안 그깟 시시한 자존심 따위는 바짝 마른 겨울 낙엽처럼 형태도 없이 바스라진다.





어리석게도 이제야 되새긴다.

먼저 사과할 용기는 한결 가벼워진 승모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내가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는 내가 그토록 버리지 못했던  '못난 쫀심'에 우선하다는 것을.



오늘은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쓸데없이 결연하게 다짐을 하며 자동차 시동을 건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밤 공기가 이제 제법 밤의 그것답다.




2018년 8월

사과는 '패배의 인정'이 아님을 새기며,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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