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아이를 낳은 후 늘 필사적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얼굴은 빠짝 마른 채로 수유 때문에 내달리면서 생각했다. "다들 어떻게 버티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엄마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완벽했다. 일과 육아,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완벽함. 나는 감탄하면서 그들을 롤모델로 삼았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육아 때문에 일에서 손을 놓는 엄마들을 볼 때면 의심은 더욱 커져갔다. 세상이 자꾸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일할래, 애볼래?
육아도 잘하고 싶고 일도 잘하고 싶었지만 내겐 에너지가 없었다. 둘 다 팽팽하게 줄을 당겨 쥐고 있기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줄을 늘이고 짧게 잡기도 하며 유연하게 뭔가 하고 싶었는데. 흠없이 매끈한 회사 인간과 엄마 노릇의 콜라보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 역시 어느 하나를 놓고 싶어 지려던 찰나,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만났다.
애도 못 보고 일도 못 하는 것 같다는 고민에 대해서는 뭐라고 답해주세요?
"그냥 힘을 좀 빼라고 얘기해요.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회사 일을 잘하는 사람과 나의 삶은 다른 거고 애들도 다 케바케예요. (...) 성장 곡선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어떤 날은 떨어졌다 어떤 날은 올라가고 계단식으로 가기도 하고요." (이혜선, 25p)
둘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도 단순한 이 이야기를 우리는 잘 듣지 못하고 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는, 매일 조금씩 나아진다는 설정 자체가 폭력적이다. 일만 하던 사람이 애도 보고 일도 하게 되었는데, 이건 둘 다를 잘 못하는 게 아니라 두 배로 잘하는 것 아닌가.
이 책은 성공 신화 빵빵 터뜨려주는 화려한 워킹맘들 이야기가 아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 조직 내에서 유리 천장을 뚫은 이야기의 허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그냥 회사 인간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소수의 성공 사례에 모두가 들 수 없다는 것도 함께. 그 대신 이 책은 헤매기도 하고 뒷걸음질도 치면서 울퉁불퉁 내 길을 찾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한다. 근데 이게 묘하게 위안이 된다. "이런 길도 있구나. 이렇게 해도 괜찮구나."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엄마들이 투명하게 드러낸 삶 자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위로를 건네받는다. 그리고 일과 육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실제 지점을 엿보게 된다.
대부분의 일하는 엄마들은 일을 사랑하지만 아이와 보내는 시간 역시 사랑한다. 바로 그 부분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지만 어느 하나도 잘하고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되고, 자괴감으로 이어지는 것. 완벽주의형 엄마들은 결국 이 지점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말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일까? 이 책에서는 일과 육아 간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오랫동안 즐겁게 하려면 여기까지 해야겠다, 이런 선을 그때부터 잡아갔어요. 그게 딱 1년 전이에요. 둘째 돌 지나고. 그때부터 적당히 일하는 걸 계속 시도했어요. 어느 정도 일이 들어오면 더 잡지 않고 거절하는 거죠. 이게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어요. 지금까지 잘라내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짧게 일해서 돈을 확 벌면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몸을 아끼면서 에너지를 분산시키려고 조절하고 있어요. 저도 아이들에게 줘야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니까요." (이민정, 118p)
또한 육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엄마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민주적인 육아에 대해 고민하고, 또 자신 때문에 상처 받는 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고민을 인터뷰에 담아낸다.
"엄마이자 아빠, 그러니까 유일한 보호자이자 양육자이자 가족 구성원으로서 가장 경계했던 것은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였어요. 우리 둘에게 충분히 개입하거나 관찰할 제3의 인물이 없는 상황이잖아요. 제가 조금만 삐끗해도 아이의 기본권을 유린하거나 갑질 하게 될 가능성이 큰 거죠." (송지현, 88p)
"제 작품을 보는 여자들이 소외감을 안 느꼈으면 하거든요. (...) 그리고 딸을 기르면서 여성의 권리를 더욱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상처 받는 여성, 더 나아가 장애인, 채식주의자, 이민자 등 소수 집단에 대한 선입견과 차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린이날 관련 일러스트에 장애를 가진 아동을 등장시킨 것도 그런 이유예요." (정민지, 169p)
이 책이 엄마들의 푸념이나 수다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현실을 짚고 이후 목소리를 내겠다는 굳은 다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육수 같은 통찰에 기반해 시의성 높은 정책들까지도 제안한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보육 시설 확대에 더해 '시간'을 지원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이다.
"일하는 엄마들의 죄책감은 기관이 온종일 애를 봐준다고 해서 덜어지지는 않거든요. 부모가 눈치 보지 않고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돌보며 워라밸을 맞출 수 있는 제도적 환경과 인식 개선이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정책 방향도 국공립 어린이 확충, 기관 설립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유연근무제, 유연출퇴근제, 단축근무제 이런 게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불이익받거나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당연히 써야 하는 제도가 돼야 하겠고요." (장명희, 103p)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야 해요. 가족 중 누군가 혼자서만 오래 일하니까 누군가는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다들 나눠서 짧게 일하고 아이도 함께 키우면 좋겠어요. (...) 시간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민정, 124p).
지금 일과 육아 사이에서 '현타'가 오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자신의 '레퍼런스'가 되는 경험을 해보시길 권한다. 아무도 들려주지 않았던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물길에 오랫동안 남아 언제고 누군가를 건너게 해 줄 단단한 징검다리 같은 책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