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문장들 속에서 유영하기
그러자 마치 직감적으로 제게 내려앉는 시선을 불현듯 의식한 동물처럼 너는 내게 고개를 돌렸고, 이에 내가 미처 눈길을 피할 겨를도 없이 우리의 시선이 만나며 무한하고도 가없는 일순간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확확한 열기가 배속에서 뺨으로 타고 올라왔고 생각은 실 뭉텅이처럼 엉켜 들었다(41p).
네가 나를 피할 수 없도록 내가 너를 피했다. 나는 네 영향력이 미치는 세력권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57p).
우리가 호숫가에서 며칠이나 머물렀는지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하나의 온전한 세계와 같았고, 매 순간이 새롭고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었으니까. 어떤 면에서 호숫가에서의 나날들은 내 생애의 첫 나날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그 호수와 호숫물과 네게서 태어난 듯이. 마치 내가 허물을 한 꺼풀 벗어던지고 이전의 삶일랑 등져버린 듯이(98p).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그런 뒤 둘이서 한마디도 없이 옷을 벗고 물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우리는 겁도 없이 자유롭게, 찬란한 어둠에 파묻힌 채 헤엄쳤다(100p).
"그러니까 우리ㅡ"
"그 얘긴 그만하자." 다짜고짜 말을 지르는 너의 어조에 서린 갑작스러운 냉기가 나를 놀랬다. "우리 둘이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게 아니잖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뜻이 안 맞을 거야."
머릿속은 휘청거렸고 손아귀 속 물잔은 서늘했다(137p).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 사진 속에서는 남매의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온갖 훈장과 메달을 더덕더덕 달고 있었다. 나는 양손을 덜덜 떨며 그 사진을 탁자에서 집에 들어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메스껍다 못해 더럽기까지 했다(236p).
그러는 내내 하니아는 시종일관 걱정과 공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기묘하게도 나도 모르게, 본능에서 우러나온 그 모든 고통과 복수심에 더해 하고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그녀에게 부탁해야만 한다는 굴욕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내 말을 들으며 보여주는 그 다정함과 친절에 사랑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271p).
그 눈물방울들은, 안도와 위안의 동인(動因)들은 저들만의 동력을 띠고 멋대로 쏟아지면서 내 얼굴을 적셔대었고 머릿속마저 텅 비웠다(273p).
나는 복도에 앉아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만 존재하고 싶었다. 비(非)존재하고 싶었다(250p).
"우리는 무슨 가망이라도 보이면 마냥 줄을 서대고, 여하간 뭐라도 받으려고 줄을 서대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데도 줄을 서고 있는지도 모르지(251p)."
사적인 어떤 부분이, 언급된 적은 전무했어도 본질적인 어떤 부분이 내게서 뜯겨나가고 있었다(254p).
"난 가야만 해." 나는 말했고, 이 말이 정말임을 알았다(266p).
그렇긴 해도 이제는 우리도 각자의 거짓말들로 무한정 속여나갈 수만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늦든 빠르든 그 거짓말들의 시꺼먼 속을 직면해야만 할 때는 찾아오니까. 우리는 그 직면의 시기를 고를 수는 있으나, 직면의 여부를 정할 수는 없다(28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