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A Feb 22. 2024

엄마랑 놀자!

나의 여행 메이트로 당신, 엄마를 선택합니다.

"나랑 여행 가자!"

엄마는 그날도 같이 여행 가자고 했다.

한 두 번 빈말이 아니라 날짜와 기간 그리고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번에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프리랜서 재택 근무자이지만  이건 나의 주장일

가족들은 나를 시간 많은 놀고먹는 백수로 보는 것 같다.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일감이 없으면 뭐 백수 맞으니까.

게다가 3개월 전에 둘째 아이까지 독립했으니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도 맞기는 하다.


엄마가 여행 가자고 말한 게 벌써 8년 전부터다.

그러니까 내가 거절하고 핑계된 게 벌써 8년이 되었다는 말이다.

내가 거절한 여행지는 한 두 곳이 아니었다.

마카오, 일본, 태국, 중국의 인근 국가에서부터

12시간은 기본  비행해야 하는 유럽은 물론

24시간에서 36시간의 비행을 감수해야 하는

남미 브라질 까지 가보자고 했으니 나로서는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엄마는 둘째 딸내미가 어디 가든 먹고살 만큼 외국말은 다 통하니

나 같은 여행 가이드가 어디 있겠냐 싶기도 했을 거다.


마카오의 경우에는 호텔과 일정까지 다 찾아 놓았지만

엄마가 여행 경비를 전부 낸다고 했을 때

돈 버는 내가 엄마를 모시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하나와

엄마 돈으로 내가 여행 가면 오빠 언니 동생한테 눈치 보인다는 마음이 합쳐져

결국 거절했다. (지금은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지만)


엄마는 7남매 중에 5번째 자녀로 다섯 딸 중의 셋째 딸이다.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는 삶 속에서 성장한, 인간관계의 달인이다.

나는 4남매 중에 셋째, 세 딸 중의 둘째 딸이다.

나 역시 언니 오빠 동생의 틈새에서 나를 키운 건 눈치와 밀당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당시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엄마는 다시 한번 달인의 표정을 하며

'알았다' 이 한 마디로 두 번 다시 함께 여행 가자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다.

거절 잘 못하는 내가 야박하게 엄마에게 거절했더랬다.


내가 출장을 많이 다녔다면 엄마는 여행을 많이 다니셨다.

늘 가이드의 통솔을 받는 패키지여행이지만

엄마가 집과 한국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나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패키지여행도 감사하게 여기며

가능한 다닐 수 있을 때 열심히 나가셨다.

대부분 아빠와 함께 다니셨지만, 아빠 없이 홀로 가는 여행길에서는

냉장고를 그득 채워놓고도 아빠가 걱정돼서

엽서도 보내고 문자도 하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세월 따라 연락 수단이 바뀌는 대로 여행지에서도 아빠를 챙겼다.


하루는, 엄마 아빠가 마루에서 카펫 만한 종이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보고 계셨다.

세계 지도가 으레 파란색과 초록색과 황토색 정도로 되어 있는데

엄마 아빠의 지도는 온통 빨간 스티커 투성이었다.

표시된 지역은 엄마 아빠가 다녀온 곳을 나타낸다.

세상에 지도가 온통 붉은색이니 엄마 아빠가 다닌 여행지가 얼마나 많은 건지

유럽 대륙은 여러 나라가 붙어 있는 만큼 온통 빨간 스티커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러시아와 몽골리아, 시리아와 알제리까지 내가 가보지 못한 곳도

엄마는 이미 발자국을 찍은 상태였다.


-엄마 더 이상 가 볼 곳 이 없는 거 같아, 가 볼떄는 다 가본 거 같은데?

북극? 남극? 여기 남았네!

-그렇기는 한데.... 너랑 여행 간 게 아니잖아.


엄마가 여행타령을 했을 때 여행지를 하나하나 숫자로 세면서

흐지부지 말을 바꾸려고 했는데 속마음을 들킨 것 마냥 움찔했다.


-가볼 만큼 가 봤지, 중요한 건 너랑 가보고 싶다는 거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시다니..


-알았어, 이번 마감 2월에 끝나고 3월에 짧은 일 있으니까

4월에 가자! 약속. 그때 내가 경비 다 대고 내가 계획할 테니까

엄마는 몸만 와!


나는 호기롭게 약속했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재촉을 한 것도 아니고

겁박을 한 것도 아니었고 '징징' 거린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담담한 엄마의 말 한마디에

나의 인정 욕구와 자식도리에 대한

이 마음이 합쳐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나의 아이들과 여행 가고 싶다. 너무나도!

하지만 나랑 놀아줄 아이들이 당연히 아니지.

20대 청년들이 엄마랑 놀아주는 건 매우 특이한 일인 거다.

나의 20대를 돌아봤을 때도 그랬으니까...

나도 내 아이들과 여행 가고 싶은데

엄마도 당연히 당신의 자식 나와 여행 가고 싶겠지!


게다가, 내가 같이 여행 갈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는 은근히 당신이 챙겨야 하는 아빠와 여행 가는 것보다

돌봄과 챙김을 받는 나와 함께 여행 가는 걸 원하시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여행을 계획했던 터였다. 물론 혼자서.

그런데 혼자서 여행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엄마 건강하고  나의 아이들이 독립한 지금이야 말로

아이들이 새 가족을 꾸리기 전인 지금,

엄마랑 놀기 딱 좋은 시간이다.


나만큼 가족 관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나의 돌봄을 거부하는 씩씩한 아이들은 독립해서 살고 있다.

내 한 몸 챙기기만 하면 그만인 홀가분한 생활이다.

내 형제들은 돌봐야 할 가족들이 아직도 있기에

나야말로 맘만 먹으면 어디든 훌쩍 떠날 수 있다.


"나의 여행 메이트로 당신, 엄마를 선택합니다. "


그렇게 나는 12월과 1월 기나긴 겨울밤 번역을 하면서

봄이 되면 엄마랑 떠날 여행지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틈틈이 검색하면서 날 따듯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