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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Mar 17. 2024

서로 다르게 운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가지는 없으니... 



수술실과 중환자실은 4층에 있다. 

그 사이에 세줄로 좁게 놓인 대기석이 있다. 을씨년스럽다. 

천장의 매립 조명등은 반도 채 켜지지 않았고 

나 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는지 

푸른빛의 좌석 커버는 반질 반질 하다 못해 갈라지고 찢어져 있다.

앉을까 말까? 이 선택으로  뭐 하나 달라지지 않으련만 

이 하찮은 선택 앞에서 조차 불안해진다.  

심호흡하고 코트의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멍한 눈으로 회색빛 벽을 쳐다만 보다가 

오빠네와 만나기로 한 게 기억났다. 

간단히 내가 어디 있는지 톡으로 알렸다.

전화기를 손에 잡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잠이 들면 좋겠는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일수록 정신이 또렷해진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한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네가 1층 로비에 도착했다는 톡이다. 



며칠 전 설날에 보고도 대면대면한 나와 오빠. 

그 어색한 시공간에 조카의 말이 불쑥 들어온다.  새언니도 말을 보탠다. 

불편함과 불안함을 감추려는 노력 어린 수다가 이어진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부스스한 오빠의 얼굴과 렌즈대신 뿔테 안경을 쓴 조카의 조잘거리는 귀여운 입,

그리고  중간중간 상대가 했던 말을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따라 하는 새언니의 어색한 행동기억난다. 

수술실로 이동할 시간이 가까워졌고 

우리는 4층 수술실 앞 엘리베이터로 자리를 다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본 게 설날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아빠와 손자 손녀를 옆에 두고 

자식과 며느리와 사위를 뒤에 두고 대가족 사진을 찍었더랬다. 

똑같은 한복을 맞춰 입지 않았을 뿐 흡사 80년대 팔순 잔치 가족사진 같았다. 

돌아가며 찍은 사진을 서로 톡으로 주고받고 반찬과 과일을 손수 싸주던 엄마. 


수술실 앞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한 환자가 침대에 실려 나온다.

경추 보호대를 한 게 엄마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송 직원이 가리고 있는 환자의 얼굴을 보려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렸다. 엄마다. 

이송직원이 엄마의 이름과 보호자님을 합쳐서 부른다. 

침대로 다가가 엄마의 모습을 얼굴에 담는다. 

엄마의 작은 얼굴은 목보호대의 너비만큼 부어 있다.

정체성을 뭉개 버리는 환자복조차도 단추가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은 채 

엄마는 얇은 시트로 겨우 핏기 없는 몸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면 알아듣지 못하고 수술 시작 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네와 나는 아무 말 없이 1층 로비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수술은 오후 1시 정도까지로 예정되었다고 전달받았다. 

오빠는 아침 식사를 제안헀다.

설렁탕과 곰탕 둘 중에 무엇을 먹을까 하찮은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밥을 먹고 어디 가서 기다릴까 주변을 찾아봤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린다. 

조카와 새언니와 나는 서로의 불안을 숨기려 의미 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신호등이 초록 불을 바뀌고 오빠는 여자 셋 뒤에서 말없이 따라온다. 

익숙한 발걸음의 사람이 땅만 보며 앞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상체를 뒤로 하고 그 사람을 가만히 본다. 


동생이다. 덥석 안았다. 

동생도 나를 꽉 안았다. 서로의 온기와 위로가 너무 필요했던 우리. 

비로소 수다가 멈췄다. 옆에 있기만 해도 나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는 동생. 

가족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가면을 써야 

불안이 해소되는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동생. 

부모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이 존재는 내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우리는 불안과 슬픔의 주파수가 비슷하지만 그 표현의 방법은 참으로 다르다. 

새언니는 오빠가 밤새 울었다고만 했다. 

반평생 엄마 속을 꽤나 썩어 문들어지게 만든 존재. 

그렇게 긴 세월 끝에 삶의 방향을 잡고 이제야 자기만의 트랙을 만들어 나가는 인간. 

할 말이 없다. 엄마와 오빠의 관계에 내가 끼어들 자격은 없다. 



카페로 들어가 말 그대로 억지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러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기억을 두고 서로 따져 물고 동시에 또한 인정한다. 

누구도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고 

누구도 자신이 첫째로 둘째로 막내로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신이 마치 장난치듯 길 가던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멋대로 한 묶음으로  만들어 버린 게 가족이다. 

필연도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작위로 정해지는 집단. 

그러니 대단한 인연이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인연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감정과 사연은 

한평생 설움이 되기도 하고  당연한 권리가 되기도 한다. 



다시 수술실과 중환자실 사이의 푸른 의자에 앉아 있다. 

우리말고도 다른 가족들이 있다. 회색벽에 붙어 있는 TV가 켜져 있다. 

섬지방에서 펼쳐지는 잔잔한 예능프로가 재방송되고 있다. 

오빠는 민폐스럽지만 좌석 3개를 차지하고 코까지 골며 잠들었고

동생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종교 프로그램을 들으며 병원 복도를 서성인다.

새언니와 조카는 서로 손잡고 어깨를 기대고 앉아 말없이 TV를 본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나 같은 내향인은 이럴 때

달팽이 집으로 기어들어가야  에너지가 안정되는데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으니 촉수를 숨기고 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진정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들뜬 말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아는 목소리다. 언니다. 고개 돌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하다 

눈을 뜨지 말아야겠다고 감은 눈에 얼굴을 세게  찡그린다.

뒤늦게 합류한 언니는 주변을 전혀 개의치 않고 누군가를 잡고 말을 꺼낸다.

자신이 전 날 강아지 데리고 야산을 등산하다 길을 잃어 119에 구조된 이야기를 한다.

동묘에서 낮술 마신 할아버지들이 상대의 말허리를 잘라가며 

서로의 잘 나가던 젊은 날의 모험담을 펼쳐 놓는 것 같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어처구니없다. 


본인이 동생에게 엄마의 수술을 알려 놓고는 

친구랑 강아지를 데리고 등산을 갔다고? 

나한테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겠다던 사람이 

무슨 힘으로 친구랑 놀러 나갔다는 거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끼어들고 싶은 유혹에 휘말리지 말자. 

언니의 입에서 천일야화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 

입 다물고 눈 감고 잠자는 척하는 게 최고의 전략이다. 


눈을 슬며시 떴을 때는 조카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언니가 보였고 

눈을 다시 또 한 번 떴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언니가 내민 커피가 보였다.

받을까 말까, 다시 한번 별거 아닌 일로 고민의 에너지를 쏟아낸다. 


자는 척하다가 진짜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4시다. 

예정 시간보다 늦어진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가슴은 불안하다. 

시계 옆 모니터에는 엄마 이름 옆에 여전히 수술 중이라고만 나온다. 

대기실은 고요했다. 모두가 정자세로 앉아 시계나, 모니터나 TV를 보고 있는 듯했다. 

언니만 수술실 앞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언니가 내 자리 옆에 두고 간 커피와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정신이 조금 든다. 


"어? 엄마 아니야? 엄마!" 

언니 목소리다. 우리 모두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아까 보다도 더 심하게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뭐라 어떻게 생각과 감정이 들기도 전에  이송 직원이 엄마를  신속히 중환자실로 밀고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가 신발을 챙겨 신고 코드를 입었다. 의사가 곧 우리를 부르겠지. 

사고 이후 의사를 처음 만나는 거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의사와 이야기를 끝내고 나왔을 때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15분 넘게 이야기했는데 머릿속에 남은 건 딱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수술은 매우 잘 되었다. 두 번째, 경추 골절에 신경 손상되지 않은 건 매우 운이 좋은 거다.

세 번째 응급 수술을 시행한 이유는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의사 파업 때문이었다. 

한없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무엇 보다도 의사 파업으로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처해 수술을 앞당겨 일요일 아침으로 잡아준게 너무나 감사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렸고 긴장했던 어깨가 이제야 아파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환자실 입구 앞에 둥그렇게 모여 섰다. 

의사가 말한 수술 경과를 전달하고 

녹취한 상담 내용을 톡으로 전달하고 

중환자실 면회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건조하게 전달했고 

동생은 다시 눈물을 보였고 언니는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이 보이지 않았고 

오빠는 나만큼 작은 눈이 더 퉁퉁 부어 눈빛을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울지 않았다. 울음이 나온다는 건 외부 요인으로 마음이 자극되어, 

마음이 동하여, 감정이 생겨나고, 거기에 눈물샘이 반응하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 극단적인 사고 앞에서도 마음이 자극되지 않았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높게 세워놓은 두터운 방어벽 때문이지 모르겠다. 

아니면 두 눈으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엄마 손을 만지고 형제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도 

내가 그걸 현실로 인지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남성성을 버리고 새언니 앞에서 마치 아기처럼 울음을 터트렸고 

언니는 강아지를 돌보며 바깥공기 속에서 불안한 마음을 해소했던 것 같고

동생은 어린 자녀들 앞에 숨겨 놓은 감정을 내 앞에 눈물로 보였다. 

나는 내가 해석되지 않았다. 마치 감정 없는 지뢰 제거 로버트처럼 

앞길을 막는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중환자실을 떠나고 30분 뒤에 엄마가 의식을 회복했다고 연락이 왔다. 

한숨 놓였다. 그런데도 너무 긴장한 탓에 낮에 마신 커피 탓에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나에게 유독 졸음을 유발하는 진통제 두 알을 삼켰다. 

다시 누워 의사의 수술 경과 녹음 파일을 여러 번 재생해서 들었다. 

눈이 스르르 감기는 듯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감을때 어두웠는데 눈을 떠 보니 

어슴프레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놓친 전화도 없고 들어온 문자도 없다. 

무탈한 밤이 지나갔고 마취에서도 잘 깨어나고 의식도 또렷하다는 엄마를 

저녁에 면회할게 벌써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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