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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Mar 31. 2024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하다

믿는 이들은 각자의 신들이 기적을 펼쳤다고 외친다  

불행한 소식은 숨기려 해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퍼진다. 

환자복을 입은 아빠는 연락과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엄마와 남쪽 섬에 여행 와 있다고 

내 앞에서 대 놓고 거짓뿌렁 핑계를 댔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사람들은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싶어 했는지 

엄마의 전화로 연락했다. 

엄마의 먹통 전화는 아빠의 핑계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차고도 넘치게 했다. 

부모님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새언니는 결국 교인들에게 

엄마의 상태를 알렸고 새벽기도와 수요 예배와 주일 예배의

환우 리스트에 엄마를 올려 엄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엄마의 이름을 앞에서 부르며 

회복과 치유의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새언니는 특히 기도발(?) 이 좋다는 장로와 권사님과 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기도를 부탁했다며 전했다.


지인 중에 산을 무지나 좋아하시는 분이 있다. 

본인의 종교를 드러내지 않지만 개인 SNS를 보면 

산과 산사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산을 타다 보니 절을 들린 건지 아니면 

산속의 절을 가기 위해 산을 타는 건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자신의 종교에 확신이 있는 건 분명했다.

염주를 손목에 두르고 개인 소지품을 힐끗 봐도 

온통 불교 색채가 강하다.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나의 소식을 이래저래 들었나 보다. 

나는 감정을 배제하고 담담하게 사고 소식을 전했다. 

엄마의 이름과 생일을 묻는다. 생각 없이 대답을 했는데 

이내 사진을 보내오셨다. 엄마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기왓장과 촛불이다. 

엄마의 이름을 두고 기도하며 시주까지 했다고 연락이 왔다. 


미국에 사는 고등학교 후배는 성모 마리아 상 앞에 가서 

오랫동안 기도했다고 연락 왔다.

작가님 중 한 분은 친척이 무속 신앙을 믿는다며, 

그분과 함께  천지신명께 빌었다고도 전해왔다. 

내 주위에 이슬람을 믿는 지인이 있었다면 

아마 그 역시도 알라 앞에 기도를 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길거리를 걸을 때도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도 

화장실에서 들어갔다 나올 때도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도  

한강을 볼떄도 하늘을 바라볼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신을 소환하여

 '제발'을 외쳐가며 마치 주술 외우는 마녀처럼 

나의 간절한 바람을 기도라는 명칭을 붙여 중얼거렸다. 




나는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유신론 자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신'이라는 명칭으로 인간사를 초월하는 존재를 부른다. 

명칭과 발현의 차이가 있을 나는 모든 신은 결국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종교도 일종의 문화이기 때문에 문화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고 나타나는 거라고.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논쟁할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다. 

종교  논쟁은 결국 그래서 신들의 논쟁이 아닌 인간들의 논쟁으로 남는다. 

종교는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의 문제이기에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건 때로는 매우 선 넘는 불쾌한 행동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면 그런가 보다 하고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독 나를 전도하거나 자신의 종교 간증을 통해 개종시키려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설득의 행동이 나를 위함인지 자신들을 위함인지 헷갈린다.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과 깨달음 없이 종교를 강제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초식동물에게 고기만 제공하고 육식동물에게 풀때기를 먹으라 강요하는 것 같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종교의 이름으로 

확장된 또 다른 사회생활을 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정말 열심히 한다면 인간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이비와 진정한 믿음의 차이는 사랑과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사이비는 사랑이 아닌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 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부로 시작했서

'반드시 ~ 해야 한다'라는 강요와 강제로 끝난다.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와 이슬람은 공통되고 일관되게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한다. 

삶과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은 

신이 내리는 사랑으로 극복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 자비, 배려, 이해와 같은 따듯한 마음과 행동을 강조한다. 


모든 사이비는 하나 같이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협박으로 끝난다. 

개인의 깨달음과 성장보다는 조직의 확장과 신도수의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마치 다단계처럼 신도들의 급수가 있고 단계가 있다. 

신 앞에서도 결코 평등하지 못한 세속 생활의 지독한 확장판이다. 

믿음의 정도를 돈으로 결정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이비다. 

마치 중세 시대에 성직자들이 돈으로 벌을 대신하는 면벌부를 파는 행위와 비슷하다. 

마음이 약해지고 감정적으로 취약해질 때 사이비는 잘 파고든다. 


정통 종교와 이단과 사이비를 구분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시작한 건 아니다. 

각자가 믿는 신과 종교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각자의 신의 성스러움을 세속생활에서 입증하고 싶다면 

길거리 포교와 원치 않는 설득보다는 

그들의 삶이 신을 믿은 후 얼마나 달라지고 성장했는지 

스스로의 생활에서 변화한 모습으로 신의 구현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로 떠드는 것보다 행동으로 그 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비윤리적인 이기심 가득한 행동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막상 가족은 돌보지 않고 

인간과 사회의 기본 윤리마저 등 저버리는 인간들, 

종교인의 탈을 쓰고 신을 장사하는 인간들, 

도파민 쏟아져 나오게 하는 각종 취재 탐사 프로그램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신의 기적보다 더욱 놀랍다. 




엄마는 하룻밤 사이에 부기가 빠지면서 

눈을 뜨고 나에게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위기를 넘기고 조금씩 회복되자

모두들 자신들의 기도가 신에게 통했다고 자부하며 

나를 자신들의 믿음으로 이끌려한다. 

엄마가 아픈 게 나를 신앞에 나오게 하려는 계획이었다며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엄마가 아플 일은 이제는 없을 거라 개종을 설득했다. 

정말이지 재밌다. 인간들이 어떻게 종교를 해석하고 의미 부여하면서 

신도를 확보하려는지 의도가 너무 말갛게 보였다. 

그들의 믿음과 의지는 대단했다. 

불확실한 삶에서 이토록 강력한 확신을 갖고 살 수 있다니!

나는 인간적인 예의를 최대한 갖추고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생각은 해 보겠다는 식으로 강한 반발보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들이 만약 이 글을 보다면 '먹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쉬울 때는 기도와 신의 음성을 믿으면서, 상황이 좋아지고 나니 나 몰라라 한다고. 

그런데, 어쩌지?... 

나는 어떤 신이 우리 엄마를 치유의 길로 이끌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와 무속 신앙, 

그리고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과 안타까움의 한숨 어린 기도,

이 기도들 중에 어떤 기도가 통했던 걸까? 

어떤 신이 기도에 응답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통해 한번에 퉁치려 한다. 

엄마와 아빠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인간 세상에 발 담그고 있는 그들이 믿는 신들과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구비 살펴보는 신들과 

바다 건너 어딘가에 있을 신들에게  감사하다고!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넙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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