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 소비는 무엇일까
소비 예찬론자가 맞이하는 지구의 날
- 지구를 위한 소비는 무엇일까
소비는 아름다운 과학이다. 세상살이 팍팍하다가도 돈을 쓰면 행복이 쉬이 찾아오곤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소비가 꼭 필요한 나는 소비 예찬론자이다. 경험이 주는 가치의 힘을 대단하게 여기는 편이며, 이 경험에 적절한 값어치가 매겨지지 않는다면 저평가되기도 쉽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책임이 받쳐주는 한도 내에서의 소비는 저축과 지출의 비율에서 오답은 없으며 개개인의 가치관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모두의 소비를 예찬하고 응원하는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살짝 헷갈린다.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는 것을 더 이상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서, 누구나 취미로 굿즈를 제작하여 부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클래스에는 각종 굿즈 제작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습법 또한 인기를 얻고 있다. '당신도 만들 수 있어요!'라는 직업 특수 경계선을 무력화시키는 끌리는 클래식한 카피들과 함께. 딴짓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걸 즐기는 나는 이런 변화가 반가웠다. 굿즈 제작과 소비가 더 대중화되었고 이제 더 이상 일러스트 페어는 관련 업자들만 방문하는 박람회가 아니라 모두가 제작과 소비를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이런 변화가 반가운 나도 진입 장벽이 낮아진 페어에 더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횟수를 거듭할수록 이런 변화에 마냥 기뻐만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최 횟수가 지날수록, 페어는 이름만 살짝씩 바꿔서 꽤나 잦은 주기로 열리고 있는데 한정된 공간에 판매자로서 입점하는 부스의 수는 점점 더 늘고 있다. 몇 년 전 입점 부스의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더라도 각 제작자들만의 개성과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굿즈들의 다양성은 각자의 색으로 빛이 났는데 지금은 흐려지고 있는 기분이다. 유행을 좇아 나도 굿즈 판매로 한몫 챙겨보자(?)는 식이 우후죽순으로 늘면서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아까 봤던 그게 그거 같은 기시감이 든다. 두 사람이 겨우 엉덩이 붙이고 앉을자리에 사람 몸집만 한 굿즈들을 쌓아두고 손님을 기다리는데 과연 저게 다 팔릴까 의문이었다. 나중에 칼럼도 찾아보고, 우연히 을지로 예전 거래처 사장님과의 대화를 하다가 들었는데 결국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예쁜 쓰레기'를 돈 주고 만들고 있다고 했다. 소비 예찬론자는 경험과 가치의 구입이 향하는 쪽이 자기만족이기에, 왜 진입장벽이 낮아져 대중화되는데 나는 마냥 기뻐만 하지 않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고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내가 무언가를 지불할 능력이 충분하고, 한 제작자의 굿즈가 이쁘고 멋있으며 실용성도 갖춰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는데, 심지어 수익금의 일부는 좋은 곳에 쓴다고 한다면 크게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여는 소비 예찬론자는 방에 비슷한 스티커 팩, 컵, 에코백 등을 쌓아둔다. 품절이라도 된다면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다음 소비에도 망설이지 않게 된다. 바라만 봐도 배부른 마음으로 이고 지고 살다가 결국은 중고마켓에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 그리고 또 새로운 것을 같은 방식으로 구매하게 되고 새로운 굿즈 제작에 지갑으로 기여한다. 내 소비가 예쁜 쓰레기 양산에 기여한다. 지구를 위한다고 만들어진 에코백과 텀블러를 사는데 이게 과연 지구를 위한 소비일까?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지구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자연 보호자들이 제정한 날이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지구를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한다. 비건 식습관을 갖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지양하고 텀블러 지참을 생활화하거나, 자신이 가진 기술과 자본으로 리사이클링을 넘어선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텀블러를 애용하고, 탄소배출을 줄이는 기술발전에 관심이 많으며, 부끄럽게도 고기는 포기하지 못하지만 친환경에 우선순위를 두고 의사결정을 하는 노력을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하는 내가 지닌 소비 예찬론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를 위한 길이 아니라면 나는 가치관에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내로남불, 논리적이지 못한 인간인 것일까. 심지어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팬데믹 선언으로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정기 수입에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일상생활이 어려워지자 임시방편 해결책으로 굿즈 대량 판매를 떠올렸다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 적도 있었다. 실은 이미 작년에 제작해서 판매만 시작하면 되는 굿즈들도 내 창고에 있는데 판매를 하지 못하고 멈추고 있는 이유도 일부는 이 때문이다. 스스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수익금 일부는 건강취약계층의 체력증진에 힘쓰겠다는 순수 목적으로 제작된 굿즈임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에 혼란이 와서 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함께 진행했던 디자이너분께서도 왜 판매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이에 대해 구구절절 대답을 못 해 드리고 어물쩡 넘어가버렸는데(페이는 지급해드렸다) 역시 확신이 없어서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미 제작된 굿즈들은 없던 일로 돌릴 수가 없으니 존재에 최대한 진심을 담아 적절하게 쓰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지만,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맞을지도 의문이고. 공부가 필요하다. 지구를 위한 소비는 무엇일까. 어렵다. 환기를 위해 정답이 딱 떨어지는 수학의 정석 풀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