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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Aug 10. 2020

불행을 말하며 행복을 그리는 아이들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미술수업을 하다가

“선생님, 저 정말 살기 싫어요. 죽고 싶어요.” 평소 밝고 늘 웃는 얼굴로만 기억되는 민주가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다가 내게 한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학생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놀라버렸다. 다음 주에 있을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냐고 물었다. 학생은 그런 건 전혀 아니라며 그냥 뭘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막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단다. 열일곱의 아직 귀엽기만 한 아이가 벌써 생 전반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니. 그야말로 번아웃된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지금 쉬어야 할 때인데.” 하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 앉아있던 (명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현이가 말한다. “정말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현타가 온다니까.” 뒤이은 다른 학생들의 너나 할 것 없는 공감의 분위기. 그 속에서 당황스러운 건 나뿐인 듯했다.

요즘 내가 진행하는 수업은 소소한 프로젝트 수업이다. 책을 좋아하는 미술교사와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서교사가 수다를 떨다가 뜻이 맞아 함께 해보자고 했다. 먼저 사서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꽃들에게 희망을>라는 책을 학생과 함께 읽고 ‘‘who am i?’라는 활동지로 자신에 대해, 그리고 본인의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플루엔자’와 ‘소확행’의 개념을 나누고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의 작품을 감상한 후, 각자의 행복의 순간을 아이디어 스케치를 진행했다. 생각했던 시기보다 미뤄지고 미뤄져 2차고사 2주 전쯤 빠듯하게 미술시간으로 수업이 넘어왔다. 미술시간에 학생들이 각자 떠올려본 작은 행복의 순간을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그려내면 수업이 완성된다. 우수작은 학교장상으로 시상도 하고 학생작품을 중앙현관에 전시할 계획도 했다. 그런 수업 도중 학생들은 대놓고 불행을 이야기한다. 시기상 1학기의 모든 과목의 수행평가가 몰린 데다가 시험을 일주일 남겨놓은 시점이 문제였을까.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한가한 주제의 과제를 내 준 현실 감 없이 낭만적이기만 한 교사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답이 안 나오는 우리나라 입시제도가 문제일까.

4교시 수업이 끝나고 급식실에서 (‘오향장육’이라는 매력적인 식단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없다며 점심도 먹으러 오지 않은 민주를 생각하다가 급기야 죄책감이 들었다. 하필이면 행복을 그리는 미술수업을 하던 와중에 그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나도 그 아이의 심리상태에 일조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그것도 교사라는 게 죽고 싶다는 아이에게 변변한 말도 한마디 못 해주었다. 그 학생이 나에게 뭘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진심 행복했으면 하는 학생들이기에, 그럴 때 해줄 수 있을 말이 무엇이었을지 점심 먹는 내내 생각하고 생각했다. 아마 “이렇게 힘들고 답답한 거 너 잘못이 아니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좀 쉬었다가 가도 괜찮다.” 같은 말 아닐까.

최근 멀지 않은 모 여고의 자살한 학생 소식이 요즘 우리 학교 아이들 입에서도 쉽게 오르내린다. 그 학교까지 갈 것도 없다. 지난주 우리 학교 기숙사에서도 자살시도가 있어 긴급회의가 열렸으니 말이다. 이 일에 해당된 소수 학생이 유독 우울감이 높아서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토록 밝아 보이던 민주, 지현이도 그런 말을 이토록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가. 입을 열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말없는 학생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답답했다.

우리 학교 1학년 학생 백십여 명이 그린 행복의 순간 중 학교 공간은 딱 두 번 등장한다. 모든 일과를 마친 후 달을 올려다보는 모습의 배경으로 기숙사 건물이, 급식실의 가득 찬 식판 앞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에서다. 초기 학생들 아이디어 스케치의 30% 이상은 자기 집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자기 전의 혹은 잠이 든 상태가 가장 행복하다는 아이들. 그건 그나마 솔직한 편이다. 쉽사리 장면을 떠올리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무리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멀리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숨어있는 순간을 찾아보라고 말해도 떠올리거나 몇몇 아이는 솔직히 그러한 순간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얼굴 표정을 알 수 없게 그려낸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다. 지금 현재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행복의 순간 따위를 떠올리는 게 너무 힘든 마음이 아픈 학생들도 있을 거라고. 물론 모두가 이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대다수는 별생각 없이 적당히 그려냈을 것이고 간혹 매우 즐겁게 작업을 한 학생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수업을 하면서 불행을 표하는 학생들의 푸념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전날 아침 설핏 잠이 들었다 깨며 나의 학창 시절과 20대까지 끈질기게 자주 꿨던 꿈이 떠올랐다. 시험기간이 내일인데 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를 하나도 보지 않았다던지, 수학 단원 통째로 공부를 하지 않아 문제를 풀 수없다던지 하는 따위의 개꿈 나부랭이 었다. 십 대 후반의 나는, 유독 시험기간에 모든 어른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엄마에게 “엄마는 좋겠다. 시험 안 봐도 돼서.”라고 말한 기억도 난다. 선생님이나 지나가는 어른들이 그냥 다 부러웠다. 공부해서 평가받고 줄 지워지는 성적에 좌절하던 시절에 내가 늘 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나도 그랬었는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혹은 더욱 가혹해진 것만 같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이제 그 우울한 시기를 지났다고 혼자 맘 편하기가 미안했다. 이 또한 지나가갈 테니 꾹 참으라고, 학생 때는 누구나 힘든 거라고, 지나면 하고 싶은 것 하며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뭔데. 고작 학교라는 지극히 공적인 공간에서 그들에게 수업 과제를 일방적으로 부과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학생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자에 불과한데. 한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내느라 고되지만, 그 가운데라도 반짝였던 순간을 떠올려보고 행복의 조각을 스스로 찾아보기를 바랐다. 적어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즐기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수업이다. 그러나 수업을 마치며 정작 ‘행복 그리기 수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더 무섭고 서글픈 것은 이 과제 역시 20점 만점으로 평가될 테니, 학생들에게 수많은 수행평가 영역 중 하나로 해치우면 그만인 것으로 여겨지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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