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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갸 Mar 29. 2023

1. 너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싫어

내 매력은 우울함 그리고 설거지야.





언젠가 반려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빤 그때 내가 왜 마음에 들었어?”


당시 나는 이성으로서의 내 모습에 잔뜩 의기소침한 터였다. 7년 간의 불꽃 같은 연애 후 30대가 되어 ‘연애 FA 시장’에 내던져진 나는, 어느덧 나이만으로도 거절당하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름모를 상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조건, 이를테면 외모, 학벌, 능력, 배경 중 무엇 하나 빼어난 것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 ‘소개’라는 것이 성사되어도, 서로간 욕망을 충족시켜줄 조건을 꼽아보며 ‘탐색전’만 벌이다 끝나기 일쑤였다.


30대에는 무엇보다 가성비가 중요해 보였다. 끝까지 잘 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 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만 같았다. 바꿔 말하면, ‘사람’ 자체에 대한 순수한 끌림이 먼저인, 그런 낭만은 30대의 사랑에 사치였던 것이다. 20대에 마지막 ‘시작’을 겪어본 나는, 그야말로 ‘연애 냉동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차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한 것이다. 소개로 만난 사이가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첫 번째 데이트만에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땐, ‘너는 썩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판결을 내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조차 나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나를 선택한 사람. 그 기대가 금방 꺼져버릴까, 궁금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물어본 것이다.


“오빤 그때 내가 왜 마음에 들었어?”


그 대답이 어떤 것일지는 몰라도, 내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유치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으레 남자들의 대답이 그러하듯이. 응당 으스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돌아오는 말이 난데없이 충격적이었다.


“너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싫어. 조금은 우울한 사람이 좋아.”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내 얼굴을 보더니 반려인은 덧붙였다.


“한 사람이 온전히 행복하기만 하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불편함까지도 떠안아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평생 그걸 모르고 혼자만 우아하겠지. 반대로 우울하다는 건, 현실의 무거움을 알고 자신이 그 무게를 지고 있다는 거야. 싸울 의지가 있다는 거지. 그때 네가 딱 그랬어. 네가 지고 있는 무게가 어떤 건지 궁금해졌고.”


장난스럽게 시작한 화제였는데, 의도치 않은 정적이 찾아왔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네가 우울해서 좋았어.’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수 있을까. 자, 이제 ‘진짜’ 대답을 해보라고, 내심 보채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그게 다야? 진짜로?”


반려인은 내 표정을 보더니 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하나 더, 설거지.”


“설거지? 설거지가 왜? 설거지를 잘 하는 게 매력이야? 요리도 아니고 설거지?”


나 참, 이쯤 되자 이 남자가 날 놀리나 싶었다.


“우리 집에 처음으로 널 초대한 날, 그날 내가 해 준 음식 먹고 설거지를 하더라고.”


“응, 얻어먹었으니까 당연히 해야지. 근데 그게 왜?”


“음,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굉장히 많은데, 넌 그 중에서 설거지를 택한 거야. 네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 밥 먹자마자 묻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설거지 하더라고. 우연인가 싶어서 지켜봤더니, 다른데 가서도 조용히 설거지하길래 좋게 봤어.”


맙소사, 이토록 구체적인 이유라니. 살면서 들어본 ‘네가 마음에 든 이유’ 중에 가장 계획적이고, 치밀한 설명이었다. 로맨틱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진심이 와닿았다. 내 마음의 음영지역을 자세히 들여다봐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아, 다행이다. 이 사람 정상은 아니구나. 이 사람도 내 옆에 있을 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외계인 같은 사람을 길들여야겠다.’




어디 가서 누가 내 매력이 무어냐고 묻거든 대답하리라.

경증의 우울 그리고 설거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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