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더위에는 망고 주스
태국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왓포 마사지스쿨에서의 마사지를 포기하고 왕궁으로 향하는 길, 30도의 한여름 더위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쏘다녔더니 (물론 무료 물 쿠폰을 쓰지 않은 내 불찰이었지만) 숨 막히는 더위가 몰려왔다. 물이라도 한 병 사 마시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내에선 그렇게 흔하게 보이던 편의점도, 카페도 없는,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흰색 벽 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1킬로도 되지 않는 이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자동차와 지하철에 지나치게 적응해 버린 탓에 '걷기'라는 기본적인 기능을 잃어버린 다리를 원망해 본다. 현대의 한국인이 모두 이렇게 나약한 것인가, 분명 이건 내가 이런 거겠지, 난데없이 철학자가 되어 상념에 잠겨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차라리 반대로 방향을 틀어 공원(Saranrom Park สวนสราญรมย์)이나 관광지(Deva Phithak Gate ประตูเทวาพิทักษ์)를 경유하며 걸었으면 좀 나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구글맵이 알려주는 (심지어 문이 닫힌) 왕궁으로의 문으로 것은 것 만이 초행길에 임하는 길치 관광객의 최선이었다. 반대(Sanam Chai Road)로 나갔으면 공원에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걸, 정 반대의 Maha Rat Road로 가는 바람에 정말 흰 벽 밖에는 볼 게 없는 고난과 땡볕의 길로 들어서 더위와 목마름에 서서히 마른오징어가 되어가고 있는 나의 앞에 형형색색의 과일주스를 팔고 있는 가판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자태에 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저건 무조건 사 마셔야 해.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 있으니 앞서가던 엄마가 돌아와 내 곁에 섰다. 바가지 가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외부에 가격표를 붙여두었으니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이 관광지에서만큼은 같은 값을 내고 먹겠구나, 좀 더 마음에 들었다.
어떤 맛의 주스가 좋을까. 왠지 왕궁과 닮은 샛노란 색의 망고 주스가 좋을 것 같았다. '커 하이 남마무앙(น้ำมะม่วง)' 내가 제대로 말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얼음으로 엎인 아이스 박스에서 시원한 노란색 주스 한 병을 꺼내주는 걸 보니 제대로 말한 듯싶었다. 혹시 설탕이나 물을 섞은 주스가 아닐까,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마시는 주스에는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판대 옆으로 열심히 망고를 손질하던 흔적들의 나의 의심을 씻어내려 주고 있었다. 고작 40밧, 1600원도 되지 않는 돈으로 태국 망고로 만든 망고 주스를 마실 수 있다니. 고작해야 델몬트 망고 주스 정도를 마시던 나에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진한 망고 주스의 맛은 환상이었다.
"역시 현지에서 먹는 신선한 망고는 장난 아니다."
"그러게."
"근데 엄마, 그거 알아? 이게 맛이 없는 거래. 12월은 원래 과일이 많은 철이 아니라고 하더라."
"이렇게 맛있는 게?! 하긴, 필리핀에서 먹었던 망고스틴도 그렇게 맛있긴 하더라."
무더운 날씨에 달콤하고도 진한 망고주스 한 입은 15년도 전인 2004년에 공연을 위하여 찾았던 필리핀과 베트남의 망고스틴과 리치의 신선한 달콤함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직 생과일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으레 동남아에 다녀온 사람들의 '과일 부심'을 부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의 달콤함에 더위를 좇아내고 마침내 도착한 왕궁의 입구는 수많은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태국 전 국왕인 라마 9세의 생일이자 '아버지의 날'이라고 알려진 12월 5일 공휴일이 붙어 있는 3-day-weekend의 시작이어서 그런지, 많은 현지인들도 왕궁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태국인들에게는 무료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무려 1인 500밧(약 2만 원)의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요하는 곳이었으므로, 표를 예매하고자 하는 외국인을 위한 부스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왕궁과 박물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는 '콘 khon' 전통 가면극 티켓까지 포함되어 있는 가격이긴 했지만, 아무렴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라지만 태국인과 외국인에게 금액의 차등을 둔다는 것이 괜히 차별적으로 느껴져 입술이 삐죽하고 나왔다. 외국인에겐 약 2-3배 비싼 입장료를 매기는 것이 일상이라는 나라에 왔으므로 이 나라의 법을 따르긴 해야겠지만.
짜끄리 왕조의 라마 1세가 방콕을 수도로 삼으며 지은 왕실 사원이자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어 '에메랄드 사원'으로 더 잘 알려진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 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와 라마 8세까지 실제로 왕과 왕족이 직접 거주했다는 왕궁(Grand Palace พระบรมมหาราชวัง)은 마치 마드리드 왕궁처럼 실제 왕족이 거주하지 않아도 명목상 법궁이기 때문인지 나름 삼엄한 경비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라이터와 같은 반입금지 물품이 있는지 가방 속을 확인받고 나서야 왕궁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경찰인지, 군인인지, 근위대인지는 몰라도 몸에 꽉 끼는 제복을 입고 서있는 모습이 지금껏 봐온 태국 사람들과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공사가 진행 중이라 볼 수 없었던 프라 몬돕 (Phra Mondop)과 프라 씨 라따나 쩨디 (Phra Sri Rattana Chedi)로 왓 프라깨우 탐방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딱 한 줄로 쩨디를 정의 내린 여행책에서는 어째서 방콕의 법궁에 스리랑카 스타일의 쩨디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오늘날 태국의 테라 바다 불교 (소승불교)가 700여 년 전 수코타이의 통치자인 람캄행(Ramkhamhaeng)과 태국의 남쪽, 나콘시탐마랏(Nakhorn Si Thammarat)에 정착한 스리랑카의 승려들이 스리랑카 불교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Lankanvamsa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태국의 왕조인 차크리 왕조(1700년대) 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당시 태국 불교에 스리랑카의 영향이 다분히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라 사웻 쿠다칸 위한 욧(Phra Sawet Kudakhan Wihan Yot) 앞의 탄티마(Tantima Bird)의 생김새가 왜 닭의 머리와 사람의 상체, 날개와 말의 다리처럼 생겼는지, 어째서 무기(?)를 들고 있는지 따위를 생각하며 왕실 도서관인 호 프라 몬티엔 탐(Ho Phra Monthian Tham)으로 향했다. 한국으로 치면 창덕궁 후원 안에 규장각이 아닐까(아님), 한국에 있는 규장각이나, 외규장각, 아니면 장경판전이 있는 해인사의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와 달리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외관은 마치 이곳이 서고보다 공주의 전각 같기도 했다.
왓 프라깨우에서 제일 유명한 에메랄드 불상을 보러 가기 전에 잠시 숨 고르기를 하기로 했다. 한참을 두리번대다가 프라 우보솟(Phra Ubosot) 앞의 살라 및에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손선풍기 바람에 숨 고르기를 해본다.
이제 고작 첫날의 오전 11시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