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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m Jun 25. 2019

<패터슨> 리뷰

김혜리 만점 영화 03

평일의 예술에 관하여 (김혜리 영화평론가)




사실 영화를 본 지는 2주 가까이 되었는데 며칠 동안 감기로 고생하고 다시 며칠은 귀찮아져서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이미 영화는 2개나 더 봤는데 이번 주에는 열심히 써야겠다. 사실 <패터슨>이 정말 좋은 영화이긴 한데 그것을 글로 풀어내기는 어려운 영화라 더 미뤄왔던 것 같다.


이전에 본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남들에 비해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짐 자무쉬의 시적인 영화들을 즐기기에는 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이 영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를 정의할 방법은 많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린 '창작'에 대한 영화인데,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영화적으로 너무 생생하게 풀어내서 시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패터슨> 다음에 쓸 영화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창작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함께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굉장히 간단하다. 패터슨시에 사는 주인공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 잠든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옆에서 깬다. 아침을 먹고 버스 회사로 걸어서 출근하는 동안  시상을 떠올린다. 버스에 앉아 시구를 좀 적다가 시니컬한 동료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일을 시작한다. 정해진 길을 돌며 버스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쉬는 시간에는 아까 써둔 시를 더 발전시킨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울어진 우체통을 똑바로 하고 집에서 로라와 대화를 나눈다. 주로 로라와 말하고 패터슨이 듣는다. 키우는 강아지 '마빈'을 산책시키러 나가지만 마빈은 펍 앞에 묶어놓고 펍에서 맥주를 마신다. 


위의 과정을 월요일부터 그 다음주 월요일까지 반복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운율을 가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적인 짐 자무쉬 영화 중에서도 특히나 시적이다. 영화 자체가 일종의 시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영화의 큰 형식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계속 시를 쓰고, 주인공이 쓰는 시가 스크린에 쓰이고, 주인공이 만나는 인물들도 시를 쓰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비롯한 시인들이 레퍼런스로 언급되는 등 <패터슨>은 시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운율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것이 쌍둥이인데, 영화 시작에서 패터슨이 로라와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패터슨의 눈에 여러 쌍둥이가 보인다.  이렇게 쌍둥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야기하려고 하면 오히려 영화의 의미를 납작하게 하는 일 같고, 이렇게 주인공의 시점에 쌍둥이가 계속 나타나며 만들어내는 리듬 그 자체가 더 중요할 것이다. 아래에 등장하는 다섯 쌍 외에도 시를 쓰는 소녀와 그의 쌍둥이도 나오는데, 같이 나오는 장면이 없어서 따로 캡쳐하지는 않았다. 내가 찾지 못한 쌍둥이가 있을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쌍둥이들


패터슨의 직업이 버스 기사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이 설정은 아마 버스 기사가 매일 정해진 경로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택시 기사만 해도 버스 기사와는 달리 매일 어떤 경로로 운전할지 예측할 수 없다. 버스 기사는 누구보다도 예측 가능하며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영화가 그리는 8일의 일상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패터슨이 모는 버스가 고장 나기도 하고, 세탁소에서 랩을 하는 사람이나 시를 쓰는 소녀를 만나기도 하고, 로라가 컵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먼저 일어나 패터슨이 침대에서 홀로 일어나기도 한다. 버스 안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대화, 남자들의 허세, 어떤 인물에 대한 소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반복적인 요소들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반대로 작은 차이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만드는데, 그렇게 일상의 작은 변주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가져야 하는 태도다.


<패터슨>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패터슨의 시점을 따라가기 때문에 국어 시간에 배운 표현에 따르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라가 집에서 벽을 칠하거나 기타를 치는 등 몇몇 장면만 패터슨의 시점을 벗어나 있는데, 영화 전체를 고려하면 아마 이 장면들조차도 패터슨이 상상하는 로라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패터슨의 시각에서만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이들은 패터슨이라는 인물이 세계(구체적으로는 패터슨이라는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공유하게 된다.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영화의 시점은 시가 창작되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절한 형식이 된다. 



<패터슨>에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패터슨은 시를 쓰고, 로라는 기타를 치고 그림을 그린다. 패터슨이 스쳐가는 인물들 중에도 예술가가 많다. 퇴근하는 길에 만난  소녀와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은 시를 쓰고, 세탁소에서 마주친 남자는 랩을 한다. 다만 이들 중에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는 없다. 이들은 모두 아마추어 시인이거나 아마추어 뮤지션이다. 영화는 이렇게 다양한 아마추어 예술가들을 통해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독려한다. 김영하 작가님의 TED 강의 [Be an artist, right now!]에서 말하는 바와 비슷할 것이다. 이상한 음식으로 패터슨을 곤란하게 만들다가도 컵케이크로 사람들을 만족시킨 로라가 보여주듯이 그 예술이 언제나 성공적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패터슨>은 여기서 더 나아가는 듯하다. 아까 영화가 일종의 시 같다고 한 것처럼, 이 영화는 독특한 형식을 통해 일상을 일종의 예술로 표현한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일상이라는 예술'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일종의 예술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예술의 원천이 일상이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더 넓게 보면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 자체가 이미 예술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 스스로의 삶을 지루하고 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3번째 영화인데 3편 모두 글을 쓰다 보니 영화가 더 좋아졌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영화를 더 잘 볼 수 있게 해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더 좋아하게는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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