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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m Jun 25. 2019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리뷰

김혜리 만점 영화 04

천진하게 지혜롭고, 투명하게 심오한 (김혜리 영화평론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누벨바그의 대표 감독 중 한 명인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작가인 JR이 공동 연출한 영화다. 2주 전쯤 봤으니 바르다 감독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통해 바르다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영화를 만드는 자신들보다는 영화가 다루는 공간(Places)과 그 속의 인물들(Faces)에 더 관심이 많은 영화이긴 하지만, 2명의 연출자가 동시에 주연배우이기 때문에 자연히 아녜스 바르다라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속의 아녜스 바르다는 전혀 거장 감독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영화사적으로 정말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인데도 전혀 권위적이지도 않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젊다거나 자유롭다는 정도의 말로 표현하기는 부족하고, 김혜리 평론가님의 20자평 그대로 '천진하게 지혜롭고, 투명하게 심오한'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했으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장면이다.  JR은 바르다가 탄 휠체어를 밀며 박물관을 가로질러 내달리고, 바르다는 무용을 하는 것처럼 팔을 움직이며 벽에 걸린 작품을 만든 이들의 이름을 친구처럼 호명한다. 바르다 앞에서는 보티첼리나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도 그저 한 명의 동료 예술가가 된다. (그것은 바르다의 오랜 친구인 장 뤽 고다르 감독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패터슨>과 마찬가지로 창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프랑스 어딘가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구상한 뒤, 인물의 사진을 찍어 벽에 붙인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개별 작품들에 담긴 이야기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기에 훨씬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작품 3개를 골라봤다.



1. 사진 속 인물은 곧 철거될 광산촌의 마지막 주민인 자닌이다. 자닌에게 이 장소는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기에, 마지막까지 버티겠다고 공언한다. 그는 광산촌 최후의 저항자이다. 자닌뿐만 아니라 영화가 주목하는 인물 중에는 사회에 맞서 버티고 저항하는 이들이 많다. 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곳에서 예술을 하며 살아가는 포니, 수익성을 낮추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염소들의 뿔을 자르지 않는 농장 주인 등이 그렇다. 무뚝뚝해 보이던 자닌이 집에서 나와 벽을 채운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며, 예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2. 이 작품은 독일군이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한 토치카(일종의 기지)에 사진을 붙여서 만들었다. 원래 절벽 위에 있었는데 떨어져서 해안가에 박혔다고 한다. 바르다가 예전에 찍었던 기 부르댕의 사진을 토치카에 맞게 붙인 것이다. 이 사진은 밀물에 씻겨나가 하루 만에 사라져버린다. 하루 만에 사라질 작품을 왜 저렇게 열심히 만들었을까? 그런데 사실 작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질 거라는 사실은 1번의 광산촌에 붙인 사진도 다르지 않다. 철거 예정의 광산촌이기 때문이다. 결국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따르면 사진이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만드는 과정이며,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영화다. 바르다의 내레이션. "사진은 사라졌고 우리도 사라지겠지만 영화는 끝나지 않고 저 선글라스도 사라지게는 못할 것 같다." (영화 내내 JR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바르다는 그런 JR을 못마땅해한다.)



3. 이 작품의 배경은 르브아르 항구다. JR은 바르다에게 자신의 과거 작업을 도와준 항만 노동자 3명을 소개하고, 바르다는 그 3명의 아내를 만나기로 한다. 바르다가 말하는 의도를 들어보자. "항상 항만 노조는 강성이라는 둥 항만 노동자 얘기만 하고 아내들 얘기는 없죠. 그래서 아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요." 바르다는 대형트럭 운전사, 미용 선생님 등 각자의 직업을 가진 아내들에게 파업과 노조에 대한 의견을 듣고, 이번에는 벽 대신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아내들이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 안에 있고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향해 걸어가게 하는 연출이 감탄스럽다.




이 영화에는 기억할 만한 대사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아녜스 바르다 감독님의 타계 소식을 들은 후에 영화를 본 입장에서는 아래의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지 앞에서 이루어진 대화다.


JR : 죽음이 두려우세요? 

바르다 : 아니, 많이 생각해 보는데 두렵진 않은 거 같아. 마지막 순간이 될 텐데 난 기다려지기까지 해.

JR: 정말요? 왜죠?

바르다 : 다 끝날 테니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나오는  마지막 사진 작품의 피사체는 다름 아닌 바르다다. 이번만큼은 바르다는 그저 찍힐 뿐이고 JR이 작품을 주도한다. JR은 바르다의 눈과 손과 발을 가까이서 찍어 기차에 붙인다. JR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평생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찍고 발로 이동하고 다시 눈으로 보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온 바르다의 삶을 담은 것이 아닐까 싶다. 바르다의 눈과 발 사진을 붙인 기차가 앞으로 나아갈 때 들리는 JR의 내레이션. "당신의 눈과 발이 이야기를 하네요. 이 기차는 당신이 못 가는 많은 곳을 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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