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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 Mar 04. 2019

거울을 보니 꼰대가 서있었다

플러스, 꼰대에 관한 고찰

경험하면 감이란 게 올 때가 있다. 결과가 좋았을 때는 '다음에 같은 방식으로 해도 되겠다.' 결과가 나빴을 때는 '다음에 다른 방식으로 해봐야겠다.' 같은 느낌이 오는 것처럼. 그리고 몇 번의 경험을 반복해도 똑같다면 더는 감이 아닌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확신도 시대의 흐름과 맞추어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수시로 상황이 변하고 기존의 옳다고 믿었던 것도 얼마든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딴따라로 저급 평가받던 가수라는 직업이 지금에는 누구에게나 동경 받는 직업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확신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은 상황이 변하든 말든 늘 해오던 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그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외쳐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나 때는 해냈는데, 왜 하지 못하느냐고 화를 내곤 한다. 도대체 왜 꼰대들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할까?


나는 그 이유가 조직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꼰대들은 상황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변화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무언가를 새로이 배워야 한다는 것도 겁나고 젊고 유능한 친구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두렵다. 그런 것보다는 그냥 해오던 대로 하면서 몇 년 남지 않은 정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게 훨씬 편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다. 기존 방식을 버리면 할 줄 아는 게 더는 없다는 걸 꼰대들은 알고 있다. 무능력한 사람은 조직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살아남고자 기존 방식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거라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고 항상 꼭대기에 군림하며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런 전제를 깔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꼰대가 취하는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자식과 아내가 길거리에 내몰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절실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옹호할 수 없다. 심정이 이해된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까지 정당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꼰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나이와 직책을 무기로 삼아 타인을 짓밟고 올라섰다. 그렇게 그들은 망설임 없이 손에 피를 묻혀가며 생존해왔다. 행동의 절도를 잃어버린 그들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꼰대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조직의 발전보다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것에 안간힘을 써왔다. 그리고 자리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도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사내정치, 모함, 이간질을 일삼고 갈등과 불신을 조장해 구성원 간 협력을 망가트렸다. 그런 그들을,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모두의 이익을 빼앗는 그들을 옹호할 수는 없다.



꼰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무도 크면서 ‘난 꼰대가 될 거야!’라고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샌가 나도 기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저강사로 활동하면서 종종 요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스키를 타라고 하려는 건 아니었고, 고령자들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나 체조를 알려드리기 위해서였다.


원활한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서 방문 전에 준비했는데, 큰 글씨로 작성한 유인물이었다. 이전에 요양원을 몇 번 가봤을 때 노트북과 모니터로 교육했더니 어르신들이 어지러워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지털 기기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보다 친숙한 유인물로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서부터 꼰대의 기질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나는 요양원을 몇 번 방문한 경험만으로 모든 고령층은 디지털 교육을 꺼려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큰 글씨로 유인물을 만드는 게 어르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역시나 준비를 제대로 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여기 어르신들은 글자가 항상 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해하는데 방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마트 기기는 다루기를 어려워할 뿐이지 사용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루한 인쇄물보다는 영상으로 보는 게 훨씬 좋다고 말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오며 든 생각이 있는데,      


1) 뜻은 좋아도 방식이 틀리면,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다

나의 유인물 방식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준비한 의도가 고령자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음에도 어르신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르신들이 불편해할지 안 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 방식을 밀어붙인 건 꼰대와 다를 바 없었다. 옳은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이런 관점으로 ‘꼰대들의 몸부림’ 얘기를 계속해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다. 무능력하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것은 신입, 고참 모두에게 해당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남을 짓밟는 방식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방식이었다면, 그 손 마다할 아랫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간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며 도와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질 못하고 고약한 수단만 일삼으니 꼰대라 불리는 것이지만.



2) 꼰대는 나이, 직책과 전혀 상관없다

꼰대의 기질은 나이가 든 사람한테서만 보이는 게 아님을 느낀 경험이었다. 내 방식만이 옳다고 확신하며 강요하는 내 모습은 ‘젊은 꼰대’였다. 나이는 전혀 상관없었다.

     

직책도 마찬가지다. 상급자처럼 무조건 권위 있는 자만이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급자의 옳은 충고를 잔소리처럼 여기며 귀를 닫으면 그것도 꼰대다. 무조건 내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꼰대이니까 말이다. 윗사람이 옳은 충고 좀 했다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야 뒤에서 깐 적이 있었다면, 본인도 꼰대가 아닐까 생각해보자. 직책이 높고 낮은 것은 전혀 상관없다.



3)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피드백’이다. 피드백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것을 혼자서 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그들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변화를 거부하고 
2) 기존 방식만을 고집하며 
3)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 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1)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2) 바뀐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강구하며
3) 자신의 이익에 더해서 모두의 이익까지 추구하는 사람


그러나 이런 것을 혼자서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보통은 스스로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고. 자신이 하는 일들이 올바르게 이뤄지는지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피드백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소통인데,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이 얽힌 일인 만큼 서로 소통하며 개선해 나아가야 한다. 바뀐 환경을 어떤 방식으로 헤쳐나갈 것인가,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를 이야기하고 정보를 공유하면서 말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확신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내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표현하는 만큼, 모두의 이익까지 수용하는 방식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때문에 피드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피드백 없이 혼자 일을 해온 꼰대들은 이제껏 일을 망쳐왔고 타인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실수를 해왔으며, 누군가의 적절한 충고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왔으니까 말이다.




여러 직장을 돌아다니며 느꼈던 고민 한 가지를 써보며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제 생각일 뿐이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꼰대라는 단어가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말을 아끼고 조심하려 노력합니다. 물론 자신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것은 좋은 자세라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누군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뭐라’했다 꼰대로 취급 받는게 두려워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꼰대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 받아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멀쩡한 사람들끼리 서로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관계가 단절되는 흐름이 사회 전반적으로 정착된다면 미래의 사회는 과연 건강할까요? 서로 도움 주지 못하고 서로 도움받지 못해서 성장이 정체된 사회는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무관심이 정답이다’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꼰대보다 더한 형태의 사람들이 등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피드백이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론 쓴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반대로 쓴소리를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성장하기 위한 상처의 아픔은 한순간일 뿐입니다. 피드백을 통해 발전한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꼰대들을 용서하는 자세도 함께 길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못된 행위를 일삼는 꼰대들도 가끔은 옳은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관록과 업무 수행의 노련함 등 배울 점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흡수해 내가 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포용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죠. 분명 많은 아픔을 뒤로한 채 다가서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이 준 아픔은 쉽게 아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포용력도 자연스레 길러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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