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족이다
* 이 글은 곧 전자책으로 출간될 예정인 '가족이 사랑한 시간, 캐나다 1년 살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책이 출간되고 난 뒤에는 부분적으로 내용이 수정/삭제될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이 책을 한창 쓰던 중에 태어나서 7년을 내 옆에서 자던 아이가 잠자리 독립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영원히 나와 함께 잘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낳은 2016년 8월부터 최근까지 수면장애를 앓았다. 부족한 모유를 짜내어 모유수유를 한 덕분에 아이는 밤새 10번도 넘게 젖을 찾았다. 더 커서는 자는 동안 엄마의 체온을 느껴야 했다. 옆자리가 조금이라도 허전하면 벌떡 일어나 울면서 엄마를 찾곤 했다. 그래서 아이가 잠드는 시간엔 잠이 오든, 안 오든 항상 그 옆을 지키고 누웠다. 졸릴 때 잠을 못 자는 때도 있었고, 반대로 안 졸릴 때도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애꿎은 양만 세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옆에서 얌전하게 자 주지도 않았다. 꼭 내 몸 위에 자기 몸을 반쯤 걸친 채로 잤다. 아니면 내 베개를 함께 베곤 했다. 아침이 되면 나는 코너에 몰린 악당이라도 된 자세로 잔뜩 웅크린 채 침대 모서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눈을 떠야 했다.
도대체 언제쯤 혼자 자는 걸까, 나는 언제쯤 잠 좀 편하게 자 볼까 푸념하다 보니 어느새 7년의 밤이 흘렀다. 차츰, 나도 아이의 체온에 익숙해졌다. 아이가 멀리 굴러가면 괜히 허전해서 자는 아이를 끌어안아 내 옆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일어나 이불을 다 걷어차고, 내복 윗도리가 가슴팍까지 올라와 배를 훤히 내밀고 자는 아이의 몸 위로 이불을 다시 덮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가 원하는 만큼 품에서 마음껏 사랑해 주고, 보듬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랬던 아이가 얼마 전부터 혼자 자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넘어갔다. 아침이면 아이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보고 천사같이 자는 아이 옆에 괜히 나도 슬쩍 눕는다. 그러고 가만히 아이를 안아본다. 언제쯤 편히 자보냐며, 너도 이제 혼자 자야 한다는 말을 했던 과거의 나를 소리 없이 타박한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줄 알았다면, 잠 못 드는 지난밤을 좀 더 많이 즐길 걸 그랬다. 잠만 혼자 자는 게 아니다. 혼자서 방에 있는 시간도 늘어간다. 이젠 숙제도 자기 방에서 하기 시작했다. 거실 테이블에 책과 연필, 장난감까지 온갖 물건을 늘어놓는다고 혼을 많이 냈었는데, 이제 곧 거실에서도 아이의 흔적들이 점점 사라질 것만 같다.
아이가 큰다.
언젠가는 잠자리 독립처럼 어느 날 갑자기, 너는 나를 떠날 것이다.
그날까지 네가 내 곁에 머물러주는 것을 절대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볼 날이 더 많아지겠지만, 그조차도 내게는 감사한 일인 걸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은 2022년 4월 25일부터 2023년 6월 24일까지 14개월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살다가 왔다. 나는 이 시간 동안 ‘아이가 크는 아쉬움’을 배웠다. 그렇다고 그전에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가는 걸 느끼는 것은 조금 다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내 인생의 시계는 아이의 시간과 같이 흘러갔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우는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고, 바깥 구경을 시켜주고, 씻기고 나면 어느덧 하루가 지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육아’에만 몰입하며 정신없이 살아왔다. 바쁜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뭔가 빠진 것 같았다. 잊고 있던 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딸 다섯 중 넷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음이 늘 아쉬웠다. 게다가 늦둥이라서 내가 크는 속도보다 부모님의 흰머리가 늘어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다른 것보다 많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뭔가 거창한 추억이 아닌, 그냥 둘이 함께 잘 보내는 하루를 꿈꿨다. 그래서 아이가 생후 100일 이후부턴 유모차에 태워 밖으로 나가 공원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에게 나뭇잎과 꽃도 보여주고, 하늘의 구름을 이야기해 줬다.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조막만 한 손이 아직 채 펴지지도 않은 그 시절부터 나는 아이와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를 매일같이 고민했다.
그렇게 아이와의 여행이 시작됐다. 나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갑자기 어느 날 계획해서 실행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여행은 삶의 일부였고, 삶 또한 여행의 일부였다.
14개월이 된 아이와 함께 떠난 남프랑스, 두 돌이 되기 전 아빠의 일 덕분에 한 달에 한 번씩 다녀온 도쿄, 26개월에 다녀온 호주의 브리즈번과 몰튼 섬에서 본 야생 돌고래들, 28개월에 다녀온 태국의 코쿳섬과 30개월에 아이와 나 둘이 제주에서 보낸 일주일과 38개월 된 아이와 단둘이 갔던 용감한 15일간의 베트남 여행, 5살 아이와 10개월간의 제주살이 그리고 그 밖에 수도 없이 많은 여행과 외출 속에 아이와 나는 언제나 함께였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은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1년 살기를 위해서 했던 예행연습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가 살아가다가 문득 힘에 부치거나, 지치는 어느 날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수심의 수영장에서 구명조끼를 입고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울던 아이가 처음으로 나와 함께 호흡하며 잠수에 도전했던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걸을 것 같았지만,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수도 없이 쉬었다가, 놀다가 가느라 2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을 했지만, 그때도 엄마가 곁에서 끝까지 기다려줬음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추억들이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고, 또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캐나다에서 1년을 살 거란 말을 했을 때, 처음 주변의 반응은 “설마 이민 가시는 건 아니죠?”, “아이 교육 때문에 큰 결심을 하셨군요.” 등이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내가, “아뇨, 그냥 가서 살아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요.”라고 하면, “좋으시겠어요.”라는 사람도 있고, 혹은 “아아.(그렇군요)”정도로 대화는 마무리가 됐다. 거두절미하고 캐나다에서, 그것도 밴쿠버에서 1년을 사는 건 꽤 비용이 많이 든다. 그리고 기러기가 아닌, 남편까지 함께 온 가족이 모두 그렇게 살다가 오려면 두 부부의 시간도 허락되어야 한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서 ‘아이 교육’이 아닌, 그냥 놀다가 올 거란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우리 가족이 뭔가 말 못 할 고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이런 경험을 하지 않고, 내 주변의 누군가가 내게 어느 날 갑자기 그냥 경험상 외국에서 1년만 살다가 온다고 하면 나도 의아해했을지도 모른다. 멀쩡하게 살던 집을 놔두고, 직장도 휴직하고, 멀쩡히 유치원 잘 다니는 아이를 유치원 졸업도 안 시킨 채 떠난다는 건 그 누가 보더라도 ‘그냥’ 가는 것 같진 않으니까.
그때는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의 생각이니까 내가 굳이 그의 생각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대답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아,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요.”라면서 결국 자기 방식대로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에겐 딱히 부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진실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데로 보는 사람들은 아무리 붙잡고, 몇 시간을 얘기한다고 한들 그들의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내버려 두기로 하고, 우리는 떠났다.
코로나 시국의 이동은 PCR 검사부터 각종 취조 느낌의 페이퍼 작성과 인터뷰까지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하는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이 귀찮은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우린 밴쿠버에 들어오기 직전, 15일간 먼저 미 서부를 여행했다. LA로 입국한 뒤, 애너하임과 코스타메사를 거쳐 샌디에고를 갔다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와 팔로알토와 몬트레이베이까지 다녀온 대장이었다. 우린 그 여행을 하는 동안 세 번의 만남을 가졌다. 이미 외국으로 이민을 와서 오랜 시간 살고 있는 지인들이었다. 모두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는 게 좋았다. 여행의 중간중간 따뜻한 환대를 받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시간은 여독의 피로와 앞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그분들의 정착기와 외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나눈 대화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장 밴쿠버에 정착해서 1년을 살아야 하는 부담감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삶이란 어느 곳에서든, 어떤 시간에서든 살아지게 마련이란 걸 배웠다. 새삼스럽고, 당연한 얘기 같지만, 생각보다 이 진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이 순간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크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른 뒤엔 또 별것 아닌 게 되는 경험을 이미 많이 해봤다. 알면서도 또다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다시 좌절에 빠지곤 한다. 당장 타향살이가 걱정되는 내공이 부족한 내 앞에 수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살아낸 지인들이 앉아있었다. 걱정 어린 나와 남편의 얼굴과는 달리 그분들의 얼굴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분들의 공통분모 안에는 ‘가족’이 있었다.
1년 살기에 대한 로망이 있는 분들에겐 벌써 김 빠지는 얘기지만, 외국에 산다는 건 고국을 떠나 낯선 타국에서 일부러 불편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다. 평생 익숙해진 생활방식과 언어, 음식, 눈에 보이는 풍경에서 벗어나 일부러 완전히 다른 문화와 생활방식, 언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단순한 여행을 떠나서, 그 안에 나를 완전히 맞춰야 함을 의미한다. 관광지를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과 달리 생활을 한다는 건 학교에 다니거나, 이웃 주민과 어울려 인간관계를 맺고, 크고 작은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직장에 가는 것까지 포함된다.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때 그 공동체는 나를 맞춰주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맞춰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굳이 그 어렵고 귀찮은 일을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한다고 할 때, “와, 너희 가족 진짜 멋있다. 정말 최고야.”라고 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쨌든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선 그 모든 것이 기회비용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아마도 누군가는 그걸 알면서도, 나처럼 주변에 개의치 않고 이미 캐나다 살기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 책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라면 분명 내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캐나다 1년 살기의 방법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는 가서 사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필요한 정보만 알려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캐나다 밴쿠버에 가는 방법과 정착하는 방법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다시 펼쳐보게 될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가족이다.
가족이 없었다면 캐나다 1년 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가족이 있으니 한번 해봐야겠다는 마음도 먹을 수 있었다. 크고, 작은 꿈을 꾸면서 살지만, 누구나 목표만을 향해서 살아가진 않는다. 삶은 사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캐나다 1년 살기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에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큰 잘못을 하고 살지 않은 이상, 그렇게까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필요까지 있는진 모르겠다. 우리는 그냥 원래대로 살았다. 다만,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나도 조급함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다는 생각에, 1년 동안 뭐 하나라도 더 해보고, 한 군데라도 더 새로운 곳에 가봐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래서 여행도 참 많이 다녔다. 밴쿠버 주변 지역부터 미 서부와 동부, 캐나다 동부, 멕시코와 쿠바까지 북미지역을 탐험했다. 체력이 허락해 주는 한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여행에 대한 추억도 즐겁고, 행복하게 남는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함께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여정 또한, 돌이켜보면 멋진 일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무용담은 언제든 다시 꺼내 봐도 행복하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아는 이 하나도 없는 낯선 타국에서 셋이 의지하며 지낸 별 것 없는 일상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립다.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일으켜 빠지지 않고 싸주던 아이의 학교 도시락, 남편이 아침마다 사다 주던 따뜻한 커피 한 잔, 동네 마트에서 셋이 장을 보고 집으로 걸어오던 늦은 오후의 가로수길, 아이의 학교가 끝나고 사 먹던 아이스크림, 우리 집 마당에 자주 찾아오던 고양이와 파랑새. 눈을 감으면 여전히 생생하게, 그 시간의 온도까지 생각나는 캐나다 살기의 거의 모든 것들이다.
누군가는 아이의 영어 교육이 목표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냥 쉬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경험과 공부를 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시작하는 1년 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목표보다는 ‘가족이 모두 사랑했던 시간’으로 추억이 남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하루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이 느낀 점은 모두 다를 것이다. 사실,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삶의 경험은 너무 소중하다.
어차피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생각한다면 개별적인 경험이란 게 달리 소용이 있을까. 나는 가족이어도 각자의 삶을 잘 살아야, 함께의 삶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1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면서 서로의 변화를 지켜봤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성장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전체의 그림인 삶을 완성하는 알알의 픽셀과 같았다. 하루를 마치며 찍은 점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재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우리 가족의 삶은 그림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그 그림은 아직 주제도, 장르도, 크기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업은 순조롭지 못하다.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이 책은, 캐나다 1년 살기는 그 과정의 일부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분들도 낯선 지점에 찍는 점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그 점 하나로 인생이란 그림이 마스터피스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