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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Nov 22. 2021

아들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그리고 항상 사랑한다

경주 2021

피로에 찌든 몸을 잡아 이끌고 용산역에 도착했다. 육체의 목소리보다 영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였다. 어디론가라도 떠나지 않으면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뇌가 보이콧이라도 하는 건지 몽롱한 아침 정신 탓인지 출발지를 헷갈렸다. 용산역이 아니고 서울역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에 여유가 있어 헐레벌떡 서울역으로 몸을 옮겼다.


나는 KTX 특유의 숨 막히는 고요함을 잔뜩 즐길 요량으로 열차에 올라탔는데, 내 자리가 하필이면 앞사람과 마주 보고 가는 자리였다. 내 자리를 기준으로 열차를 절반으로 접으면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보는 식으로 되어있었다. 다행인지 코로나로 인한 마스크 덕분에 입을 벌리고 자도 민망한 상황은 피하겠다마는, 넓지 않은 좌석에 정강이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내밀면 앞 좌석 사람과 정강이 하이파이브를 해야 했다. 이거 5만 원이나 내는 기차 좌석인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10년 만에 찾은 경주는 이전보다 활기가 가득한 듯했다. 신경주에 역에 내리니 젊은 커플들이 들뜬 표정으로 상쾌한 가을의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있었다. 마치 단체로 온 수학여행인 듯 신경주에 역에 내린 관광객들은 모두 같은 시내버스를 탔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황리단길"이 위치한 서라벌 삼거리에서 하차했다. 서라벌이라... 옛 지명은 오히려 한자로 된 요즘의 지명보다 그 원뜻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다.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서라벌은 신라 6촌 중 하나인 새라에 들판이란 의미의 불이 붙었다는 설, 동쪽의 들판이라는 설, 쇠+벌에서 왔다는 주장 등이 존재한다고 한다.


10년 전엔 "황리단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경주는 수학여행으로 오는 역사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제 경주의 황리단길이라는 공간은 역사와 전통의 고전미와 요즘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더한 "힙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온갖 군것질거리들과 음식점, 소품 가게들이 골목골목 즐비했다. 또 어찌나 공사를 많이 하던지, 더 이상 천년의 고도가 아니라 신도시 공사장 같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사 소음과 먼지에 지쳐가며 미리 찾아온 밥집을 찾아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옛집 특유의 낮은 철문을 통과해 얼굴을 빼꼼 내미니, 귀에 헤드폰을 끼고 기다란 장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듯이 쳐다본다. 역시 미디어에 노출된 밥집은 오는 것이 아니었나. 그날도 무언가를 촬영 중이었다. 촬영을 위해서 이렇게 300km를 달려온 식객을 내쳐도 되는 겁니까.


두 번째 찾아간 밥집은 대기 줄이 두 시간은 되어 보였다. 아예 대기 공간을 제대로 마련해 놓은 갈빗집이었다. 이런 긴 웨이팅은 나에게 도통 용납하기가 힘들다. 경주에서 맛있는 것 좀 먹어보겠다고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벌써 오후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세 번째에서야 겨우 발 붙일 밥집을 찾았다. 한옥 건물 두 개를 소담하게 쓰고 있는 생선구이 정식집이었다. 한쪽 건물은 통유리로 된 기와 건물을 주방으로 쓰고 있었고 다른 건물은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마당에도 테이블을 내놓아 분위기가 퍽 좋았다. "경주어보", "생선구이"라는 커다란 붓글씨를 써놓은 명패도 마음에 들었다.


가게에선 먼저 밑반찬을 내주었다. 수도 8가지나 되어 밑반찬만으로도 식사가 가능해 보였다. 밑반찬 모두 경상도답게 간이 멀멀하지 않았고  입맛에 맞았다. 미역국을 호로록 마시며 밑반찬과  밥알을   집어먹고 있으니 내가 주문한 고등어 구이가 나온다. 접시를 한참 초과하는 길이의 고등어는 일정한 간격으로 칼집이    표면이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때깔 좋은 요리였다. 젊은 감성답게 레몬 슬라이스와 고추냉이도 곁들여져 나온다. 나는 해산물에 레몬즙을 짜거나 바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아주 마음에 드는 구성이었다. 기름진 고등어를 허겁지겁 먹고 나면  어떤 소고기보다 뱃속이 풍부하게 기름칠 쳐지고 든든한 에너지를 얻어갈  있다.  주변 모든 테이블은 가족 단위였는데, 나는 1 손님이라  앞의 의자 하나마저도 치워버려   스크린처럼  유리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오른쪽에서는 모녀가 부지런히 떠들고 왼쪽에서는 아이들이 재잘대는데,  사이에서 고독하게 밥을 먹는  모습이 왠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고독은 내가 철저하게 컨트롤한다는 일종의 자부심이 들었달까.


부른 배를 들쳐 올리며 조용히 산책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채워주기에 경주는 최적의 도시였다. 마치 부드러운 젖가슴 같은 능들이 여기저기 분포해있는 것이 경주 방문객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나는 종종 뜬금없이 고속도로 바로 앞에 있는 산등성이에 있는 무덤들을 보며 조금 "관종"스러운 무덤이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 경주의 능들은 그렇게 따지면 관종의 끝판왕이다. 그래 뭐든지 끝판왕으로 해보는 인생 나쁘지 않지.


첨성대는 멀리서 봐도 작았고 가까이서 보면 큰 듯했으나 사실 관측대라고 보면 그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높이였다. 물론 과학적 기능보다 주술적 종교적 의미 쪽으로 이해를 해보면 조금 더 납득이 간다. 우리 선조들은 어마 무시한 스케일 이런 쪽이랑은 역시 안 맞았던 듯싶다. 하긴 경주를 둘러싼 산들이 이렇게 오밀조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는데,  에펠탑만 한 첨성대가 세워져 있다고 하면 그것도 참 싫었을 것 같다. 종종 도시 부흥을 위해 되지도 않는 뜬금없는 건축물을 떡 하니 세워놓는 오늘날의 시 행정 만행에 비하면 서라벌 시대 때가 조금 더 미적 감각이 뛰어난 행정가들을 보유했다고 봐야 하는 걸까.


이 땅은 이제 역사의 흥망성쇠와 관련 없이 한반도의 가을을 있는 힘껏 받아들이는 하나의 고즈넉한 정원이 되었다. 역사 속엔 없었을 반사되는 금박에 눈이 부실 정도의 한복을 입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커다란 고목 아래 앉아 10대 소년처럼 파안대소하는 할아버지들, 감나무 아래서 하나라도 따 보겠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어린 아들과 그 부모, 고국에선 즐길 수 없었던 가을과 우리 역사에도 없던 핑크 뮬리 앞에서 몇 시간 째 허리를 꺾으며 사진을 찍는 동남아시아 관광객들. 이 땅에 있는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간간히 덮여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수직으로 커튼을 친다. 핀 조명 같기도 하고 오로라 같기도 한 저 햇살이 내물왕릉 위를 비춘다. 터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비석이 고독하게 서있고, 저무는 계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화려한 자연의 색에 축제라도 열어야 할 성싶다. 사방을 둘러봐도 완만하고 낮은 능선과 하늘뿐이라 마치 이곳이 하나의 커다란 무대 같다. 산이라는 관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 그저 인간들은 제 역할을 열심히 해내면 되는 무대.


10년 전 경주에서의 황남빵 맛이 그리워 황남빵 본점을 찾았다. 내가 10년 전에 갔던 황남빵 집이 여기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통 모든 가게가 경주빵 황남빵이라고 외쳐대니,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으니까. 실제로는 같은 집이 맞았을지 몰라도, 가게의 외연은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웬만한 주차장만 한 크기에 번듯한 2층짜리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게 안은 마치 고등학교 급식소처럼 광활했고, 구조적인 목조 의자도 인테리어 겸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만들자마자 내놓아서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황남빵은 없었다. 대규모의 손님을 상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여러 개의 박스가 순차적으로 손님들에게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전의 그 맛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다. 광활한 가게 규모 탓인지 훈훈하고 분주한 가게의 분위기도 다시는 느낄 수 없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첨성대에서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린다. 나는 요즘 일부러 여행지 번화가에서 20-30분은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는다. 첫째는 번화가의 번잡함과 소음이 싫어 서고, 둘째는 그 20-30여분의 걷는 시간에 내게 주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늘도 혼자서 터벅터벅 숙소까지 걸어간다. 가는 길에 ‘선덕여자중학교’가 보인다. ‘선덕여왕은 알았을까. 천 삼백 년 뒤에 자기 이름을 딴 여자중학교가 생길 줄.’, ‘학창 시절엔 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와 같은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아침부터 돌아다니느라 피곤한 몸을 뉘어 잠시 눈을 붙이고 짙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숙소에서 15분 정도의 거리. 그런데 숙소에서 목적지까지 어찌나 우주와 같은 어둠이 펼쳐지던지, 사람이 많이 찾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허허벌판이 많구나 싶은 생각. 대도시의 사람들은 층층이 쌓인 건물에서조차 살지 못해 안달인데, 이곳은 그냥 땅이 버려져 있구나 싶은 생각. 길가에 가로등에 첨성대와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가 그려진 것을 보니 아기자기함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저녁 7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동궁과 월지에선 늦은 시간이라 착각한 나를 비웃듯 많은 관광객들이 시끌벅적하게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동궁과 월지는 원색적일 정도로 황색 조명을 적나라하게 받고 있었는데, 야심한 시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깔깔대며 시끌벅적하게 하니 마치 문화 유적의 포르노 버전 같달까. 신라 시대의 동궁과 월지는 왕족들이 대낮에 조용히 여유를 즐기는 곳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나뭇가지 꼭대기에 왠 허연 뭉터기들이 잔뜩 있길래 유심히 관찰했더니 전부 새다. 새 종류는 알 수 없으나 잠을 자지 않고 조금씩 움직인다. 야행성인가? 야행성이라면 굳이 이 밤에 조명이 훤히 비추는 이곳에 자리한 이유는 뭘까? 한편 한국인들은 어딜 가도 먹고 살 거라는 명확한 증거 하나. 사람이 몰리는 곳에 무조건 길거리 상인이 있다. 동궁과 월지 앞에서도 반짝이는 풍선을 파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피곤한  그리고 너무나도 고요한 경주의  덕에 일찍 잠을 청할  있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낮에 다과 타임에 먹었던 차와 티라미수가 문제였을까. 새벽  시쯤에 겨우 잠에 들었다. 하지만 가을 아침의 강렬한 햇살은 피곤한 여행자도 일어나게 한다. 이른 차편으로 인해 서둘러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고 숙소를 나선다. 아침 공기가 더없이 상쾌하다. 어제 왔던 길을 똑같이 터벅터벅 걸어간다. 어제 지나갔던 학교를 다시 지나가는데 아침 일찍 어디론가 향하는 야구부 학생들이 보인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런지 학교 정문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아들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그리고 항상 사랑한다 문구를 보는데 난데없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앞엔 허리 굽은 할머니가 폐지 수레를 천천히 끌며 발걸음을 옮기신다.  뒤를 따라 걷는  눈에선 당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을까. 나는  년이 지난 지금도 부모님께 위로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수험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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