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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Sep 15. 2024

베르나르 뷔페와 백석

- 미술과 역사 1

베르나르 뷔페(1928-1999)는 고등학교 미술책에서 처음 만났다. 이마에 깊은 주름을 한 삼각형 얼굴의 사내가 백열등 아래서 계란프라이 하나를 놓고 커다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은 50년의 세월에도 남아있었다.   

접시 위의 계란 그리고 남자, 1947,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베르나르 뷔페 전시(2024. 4.26-9.10)는 5년 전 한국 전시가 성황을 이루자 다시 기획한 것이라 한다. 화가의 생몰연대를 보니 동양의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 1970년대 교과서에 실릴 때 화가는 현역 생존 작가였다. 하기야 20세이던 1948년에 비평가 대상을 받고 뒷 해부터는 세계 50여 곳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니 세계적 역량은 이해할 만하다. 1948년은 내 고향 제주에서 4.3이 일어나던 해, 해방 후 나라틀이 안 잡히고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제주사람들이 공권력에 학살될 때 베르나르 뷔페는 세계 순회 전시를 하고 있었다.

       가오리와 물병, 1948


 가오리 한 마리가 녹슨 쇠못에 턱 걸쳐져 있었다. 전시장 입구 맨 앞에 걸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느슨했던 세포가 긴장되었다. 덩그마니 걸린 가오리는 피가 군데군데 묻어있고 밑에 그릇을 받치고(피를 받는 용도인 듯) 있어 실제 보는 것 같은 현물감을 주었다. 비린내가 눌어붙어 있는 것 같은 벽면에 여기저기 찔린 자국으로 매달려있는 가오리와 반도 채워지지 않는 청회색 물병의 스산함. 생선가게는 먹거리의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화사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보자기로 덮어씌웠던 기억의 조각들이 맥없이 풀리며 내 유년의 궁핍을 소환하고 있었다.

 저녁거리로 어머니가 동태를  사 오라고 하면 길가 좌판에 앉아 ‘내 것 사가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모른 채 지나야 했다. 친구어머니께 가서 알 밴 것으로 한 마리 달라고 하면 사과궤짝에 꽝꽝 언 동태를 갈퀴로 떼어내 시멘트봉지에 싸서 주었다. 그 한 마리에 묵은 김치를 잔뜩 넣고 8 식구가 맛나게 동태탕을 먹었다. 고단한 한국현대사에서 평균치 삶을 산 사람들이 거쳐온 모습, 그 편린들이 생채기 난 가오리 핏빛과 삭막한 가게 풍경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아티초크꽃. 1989

이어 꽃 그림이 몇 점 걸려있었다. 엉겅퀴같이 가시가 많은 꽃들을 택해 그린 의도도 가늘고 예리한 선들이 모여 꽃송이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림은 소재별로 나누어져 전시 기획의 의도가 잘 드러났다.

과일바구니, 캔버스에 유채, 1957,  54*65

바구니 속에 들어있는 과일은 수분이 말라 목이 메일 것만 같다.  날카로운 잎사귀도 과일을 온전한 먹거리로 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나이가 중년을 넘어서고부터 거친 것, 날카로운 것, 뾰족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 자연의 선은 원래 곡선이라고 믿으며 둥글고 부드럽고 넉넉한 품으로 아우르는 곡선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이다.  

 나에게도 직선의 격렬함이 내 속살을 찌르며 진격해 오던 때가 있었다. 40대를 보낸 전라남도 나주. 나주의 3월은 배나무의 연둣빛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시기이다. 겨우내 검은빛으로 고사할 것 같던 늙은 배나무들이 일제히 햇가지들을 뽑아 올리고 있는 장면을 보는 순간 분출하는 가지가 자궁 속을 깊이 찌르며 가슴까지 쳐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연둣빛 배나무 순이 날카로운 직선이었다. 곁으로는 온화하게 그러나 내부는 날카롭게 벼리는 긴장을 놓지 말라고, 세상의 이치를 온유함과 부드러움만으로 성급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 너의 몫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던 기억을 뷔페는 상기시켜 주었다.

아나벨 쉬아브 뒷모습. 1961년 1월 19일, 195* 80 캔버스에 유채

“예술가로서는 천재적이고 위대한데,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죠 “

 아나벨 쉬아브는 화가의 고독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을 그  아득한 거리를 잘 조율하였던 뮤즈이자 좋은 아내였다.

서커스의 광대, 1966


전시장은 몇 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있었고 자화상 코너에는 돈키호테나 광대의 모습으로 분장한 화가의 모습들이 있었다. 당대의 프랑스 시민들은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광대 초상화를 집안에 한 점씩 걸었다고 한다.  돈키호테 시리즈를 전시한 곳을 돌면서 북경대학교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세르반데스 동상이 떠올랐다.  최초의 근대인 돈키호테는 위키피디아 설명에 따르면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아는 지를 정확히 알고 목표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베르나르 뷔페가 천착한 돈키호테는 어느 지점이었을까.

클리지 , 1990 캔버스에 유채, 97*146


나는 그의 그림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것이 좋았다.샤르트르나 까뮈가 글로 부조리를 묘사할 때 그는 차갑고 어두운 색을 바탕으로 슬쩍 닿기만 해도 생채기를 낼 것 같은 날카롭고 뾰족한 직선으로 그 시대 부조리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선은 아름답다고, 곡선이 줄 수 없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이고 진취적 미의 한가운데 직선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안에는 아직 직선의 아름다움을 감당할 에너지가 앙금처럼 남아있음을 알려주었다.  

푸른 셔츠의 자화상 ,1957

27세의 자화상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고단함이 잔뜩 낀 얼굴이다. 앙상한 팔과 깊은 이마 주름, 슬픈 눈매가 이미 청춘을 반납한 사람 같아 그림 그리는 일의 고단함과 숙명을 느끼게 한다. 전체적으로 직선으로 표현되었지만 뷔페에게 직선은 내가 생각하는 굳고 날카로운 선이 아니었다.

갤러리 샤르팡티에서 자화상을 걸고 있는 뷔페, 1958


 자화상 그림 앞의 화가는 젊고 준수한 젊은이인데 자화상은 족히 10년은 늙어 보였다.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받으며 부와 명예의 정상에 있는 시기에도 여전히 화가의 내면은 어둡고 우울하고 괴롭고 지쳐 보였다. 밝고 따뜻하고 화사한 것을 지향할 때 그 안에는 빛만큼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것은 생명의 이치이기도할 것이다. 그 이면을 포착하여 인간 보편의 공감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 또한 예술의 속성이니 이런 점에서 예술가란 천형의 직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광대의 얼굴>, 1955


 이번 전시 포스터 그림인 이 <광대의 얼굴>은 화가의 얼굴이고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속 풍경을 다 드러낸다면 세상은 생지옥이 되지 않을까.  불거진 목울대가 삼키고 있는 것은 무얼까. 눈썹도 짝짝이인 광대의 두 눈동자가 슬프다. 우리들이 감추고 살아가는 내면을 화가는 광대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상사, 세속의 법칙 너머를 사유하고 싶었던 화가.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천착해 들어가는 그의 영혼은 나날이 깊어졌지만 물리적 육체의 나이는 따로 있는 것이어서 69세에 발견된 파킨슨병의 증상을 의지로 극복할 수는 없었다. 뷔페는 죽기 전 6개월 간 작업실에 틀어박혀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을 25점 그렸다. <죽음 15>는 그가 남긴 마지막 그림이다. 죽음 15작 시리즈를 보면 생 너머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면밀히 바라본 흔적들로 화면이 가득 차 있다.

<죽음 15>, 1999

 광대모자를 쓰고 저승을 재촉하는 새들에 둘러싸여 피오줌을 누고 있지만 그림 속 해골은 웃고 있다. 눈이 반짝이고 젖가슴은 풍성하고 배 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어깨에 앉아 속삭이는 주황깃털의 새가 해골을 외롭지 않게 한다. 죽음 15를 그리며 뷔페는 말한다.

“ 내가 사는 방법은 그림이었다. 그림은 내게 숨을 쉬는 도구이자, 내 삶의 지팡이였다.”라고.

 예술이란 이렇게 비정한 것. 그들의 고통 깊이만큼 인류는 누리는 것. 죽는 날까지 성모상에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고 생을 스스로 마감할 수 있던 그는 죽음까지도 자신의 의지대로 장악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그의 생이 처절하지만은 않다.  

          <산형꽃차례 너머 보이는 작은 성>, 1968


꽃도 나비도 작은 성도 모두 직선의 조합체이다. 여유가 생겨 색채를 맘껏 쓸 수 있었던 시기지만 화가는 여전히 직선의 세계에 있다.

  문득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백석(1912-1995)이 떠올랐다. 시어구사가 순수한 우리말 고유어로 집중되어 30대에 시의 경지에 올랐던 백석은 한국전쟁 겪고 북에 남았다. 이후 백석은 시를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요구하는 덕목을, 주체사상이 원하는 내용을 그의 시어로 담아내기에 시인의 본질이 흔들리는 문제였을 것이다. 삶에서는 패배할지라도 시에서는 양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젊은 시절의 백석

 

(상 략)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서른에 이 시를 쓴 백석은 분단 조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 되어 번역이나  동시를 몇 년 쓰다가 절필하고 양을 치며 84세까지 살았다.


“양들에게 먹이도 주고 또 양 떼를 몰고 높은 산상의 방목지로 오르는 일이 다 제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성실히 하여 나가는 가운데서 제가 기필코 당과 수령이 요구하는 로동 계급 사상으로 개조되어야 할 것을 마음 다지고 있습니다.” ( 1959, 삼수 관평에서 )


36년 간 시를 못쓰는 삶도 가족을 거느린 백석에게는 견뎌야 하는 삶이었다. 베르나르 뷔페에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여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화가가 되고 싶다”라며 자살을 택했다.

 뷔페는 2차 대전 후의 궁핍을 빈 냄비, 한 두 마리 달랑 있는 생선가게들, 삭막한 식탁의 빈약한 먹거리로 표현하였다.  일제식민지 하에서 우리말로 시를 쓰고 고향 음식을 노래하던 백석은 시를 지키기 위해 시를 버린 사람이었다. 식민지 백성이던 백석의 모국은 하얀 쌀밥과 달재생선, 메밀국수, 맑은 대구국, 털 숭숭 박힌 도야지고기(돼지고기) 등에 스며 있다.

  100년 전 백석의 뼈와 살과 영혼을 살 찌우던 음식들은 지금 나에게까지 와서 정체성의 뿌리를 살금살금 흔들고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안고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베르나르 뷔페와 백석이 같이 떠오른 것은 열대야를 방불케 하던 올여름 조우했던 두 사람으로 내 삶에 생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들뜬 영혼을 가라앉히고 육체의 맥박을 가동하는 먹거리들, 그런 것들을 일제 강점기의 백석은 시로 썼고 세계대전의 여파를 목격한 프랑스의 뷔페는 그림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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