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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주 Feb 19. 2021

띄어쓰기: 단어의 밀당

단어와 사람 사이


띄어쓰기가 아주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주 어려워서 맨날 사전을 찾아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띄어쓰기를 “글을 쓸 때, 어문 규범에 따라 어떤 말을 앞말과 띄어 쓰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내 나름의 정의로 띄어쓰기는, 단어와 단어의 경계를 구분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어의 띄어쓰기를 아주 어렵게 하는 녀석들이 조사와 어미와 의존명사, 특히 조사다. 조사는 단어인 주제에 띄어 쓰지 않는다. 아주 골치 아픈 녀석이다.


또 골치 아픈 점은 언어 관습의 귀납적인 면이다. 사람들이 꽤 오랫동안 매우 자주 붙여 쓰다 보면 띄어 쓰던 것도 붙여 쓰게 된다. 그래서 모든 언어와 모든 세상살이가 그렇듯 규범이 있으면 예외가 있다.




어문 규범에 따라 우리는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어 쓴다. 그런데, ‘띄어쓰기’는 한 단어로서 붙여 쓰지만, ‘띄어 쓰다’는 띄어 쓴다. ‘띄어’‘쓰다’가 각각 다른 단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띄어쓰기'는 무엇일까? '띄어'‘쓰기’도 서로 다른 단어다. 그러므로 띄어 써서, ‘띄어 쓰기’가 일견 어법에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띄어쓰기’는 전문 용어이므로 붙여 쓴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너무하지 않나.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실지 궁금하다. 나름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띄어쓰기’를 한 단어로 쓰는 것이 옳다기보다도 이롭다. ‘띄어쓰기’를 전문 용어라고 하였지만, ‘전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용어’라는 점이 중요하다. ‘용어’라서, 한몸으로 널리, 자주 쓰인다.


바꿔 말해, 한몸이 될 정도로 꼭 붙어 있어야 ‘용어’로서의 의미를 제대로 발할 수 있다. ‘띄어’‘쓰기’함께 힘을 합쳐 ‘띄어쓰기’의 의미를 만들고 있으며, 따로 떨어져서는, 서로 다른 단어가 되어서는 하나의 의미, ‘띄어쓰기’의 의미가 되기 힘들다. 두 단어에는 너무 다른 두 의미가 있고, 그나마 한 단어여야 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띄어쓰기를 잘하자.

띄어 쓰기를 잘하자.



예문으로 보면 훨씬 명확하다. 후자는 쓰기를 잘하자는 것인지, 띄어내기를 잘하자는 것인지, 띄어서 쓴다면 무엇을 어떻게 띄어 쓰자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하지만 전자는, '아, 한국어 맞춤법의 한 요소인, 어디서 틀리면 감점을 당하기도 하는 바로 그 ‘띄어쓰기’를 잘하자는 것이로군,' 하고 바로 이해가 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말이 붙어 하나의 용어를 이루는 경우, 띄어져 있을 때와 다른, 혹은 보다 정확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정 아니면, ‘띄어 쓰기’를 늘 띄어 쓰는 것이 데이터 낭비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한몸인 것을 굳이 매번 띄어 쓰면 1byte씩 낭비다. 1byte도 모아서 태산이다.




그렇다면 띄어 쓰고 붙여 쓰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띄어쓰기, 단어와 단어 사이를 가르는 공간에 어떤 힘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늘 상상해본다. 이 상상 속에서 단어들은 마치 사람처럼 관계를 맺는다. 띄어쓰기는 단어들이 서로 친해지기도 하고 불화하기도 하는, 그런 낯익고 재는 하나의 이야기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서로를 밀어내는 힘, 척력이 있다. 서로 다른 단어는 보통 서로를 밀어낸다. 구분되어 있어야 각자의 의미를 정확히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거리를 두어야 다른 사람이다. 거리가 사라지고 한몸이 되면 각자의 개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낌이 딱 온다. 너와 나는 다르잖아. 그렇다면 우리, '거리두기'를 하자. 붙어서 좋을 일이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서로를 당기는 힘, 인력도 있다. 단어와 단어도 관계 맺기 나름이라, 붙어 다니다 보면 서로 금방 친해지기도 한다. 곧 죽어도 못 떨어지겠다는데 남이야 어쩔 도리가 있나? 계속해서 둘이 하나라고 주장하면 별다른 수가 없다. 붙여 써줄 수밖에. 너와 나는 달랐지만, 언젠가 하나가 되고 싶을 수 있어. 각자의 개성은 조금씩 내려놓아야겠지만, 합할 때 재밌는 일이 생기고는 하잖아. 마치 '띄어쓰기'가 그랬듯이.


이렇듯 단어끼리 남남일 때가 있고, 남이 아니게 되어 재밌을 때가 있다. 둘 사이의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을 정확히 계측할 수는 없는데, 그런 힘들이 존재한다는 점과, 힘의 정도가 각자 다르다는 점 정도는 상상해볼 수 있다.




앞에서, 조사가 단어임에도 다른 단어와 붙어서 이상하다고 하였다. 조사와 다른 단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 사이에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나. 무엇이 어쨌길래, 조사만 나타나면 서로 다른 단어였던 둘이 꽉 붙어버리나. 밀고 당기고 해야 하는데, 항상 당겨 붙는 것은 이상하지.


조사는 의존성이 대단히 강한 친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남과 붙어야 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 나와 꼭 닮았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제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다만 그 역할이 다른 단어에 꼭 붙어 다니는 일이다.


단어를 정의할 때, ‘단독으로 있을 수 있느냐’를 묻는다. '내가 밥을 먹었다'고 할 때, '가', '을'이 바로 조사다. '나''밥'은 그 이외의 다른 것을 모두 지우고 그 혼자만 남겨도 나름의 의미가 여전히 있다. 단독으로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밥'은 단어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가''을'만 남긴다고 상상해보자.


내가 밥을 먹었다.

 밥 먹었다.

을 먹었다.


'가''을'만 덩그러니 남으니 너무 쓸쓸해 보인다. 조사는 단독으로 있으면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조사는 단독으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러면, 조사는 단어가 아니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볼 수 있겠다. 단독자가 아닌 주제에 존재감이 대단하다. 아무 단어 뒤에나 꼭 붙어 다니니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밀어내는 힘이 없는 수준이라 누가 와도 잘 붙어준다. 한편, 다른 단어들도 조사를 꽤 매력적으로 여겨서, 저들끼리 스스로 조사를 당긴다.


이렇게 매력 어필을 하고 있으니, 국어학자들도 그래 너 단어 해라, 하고 인정해 줘 버렸다.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 나약해서 어디로든 의존하러 다니는 모습이 가엾고 귀찮지만, 그것도 자립하려는 노력이니까. 사람들도 그렇지. 가족, 친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또는 많이 의존하다가, 언젠가 자립을 꾀한다. 의존으로부터 힘을 모아 자립한다. 물론, 여전히 약하다. 완전한 단독으로 있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응원해주자는 마음에서 단어의 지위를 챙겨 주었다.


단독으로 있을 수 없고, 다른 단어와 띄어 쓰지도 않는 조사가 그럼에도 단어로 인정받은 이야기다.


이거 그런데, 어미 입장에서는 굉장히 서운한 일이다. 어미도 조사와 처지가 비슷하다. 단독자는 아닌데 나름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조사가 외향적 내향인이라면, 어미는 내향적 내향인이어서, 끼리끼리 또는 용언 하고만 논다. 사정이 이러니 어떡하겠나. 조사도 겨우겨우 단어 시켜준 마당에 영 소심한 어미까지 올려줄 여유가 없다. 다들 너무하기도 하지.




조사와 어미는 특이한 친구들이었다. 잘 안 밀고, 잘 당긴다. 이들의 성격이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엿한 단독자인 다른 단어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성이다.


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단어들은 이미 자리 하나씩 잡았고 자존심도 강하다. 쉽게 자기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예외를 제외하면 다들 미는 힘이 강하다. 그러므로 조사를 제외한 다른 단어들은 쉽게 띄어 쓸 수 있다. 고민될 때, 최대한 띄어 쓰면 맞출 확률이 높다.


하지만 심하게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예컨대 ‘띄어쓰기’였다. 전문 용어의 결합은 비교적 뚜렷하고 공식적이다. 그렇지만 꼭 전문 용어가 아니어도 사이좋은 관계가 있다. ‘띄어쓰기를 잘하자’에서 ‘잘하다’가 그렇다. 부사 ‘잘’과 동사 ‘하다’가 결합했다. 둘이 다른 단어임에도 합쳤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결합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의 사이가 다른 이들보다 확실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쓰다’, ‘잘 먹다’는 잘만 띄어 쓴다. '잘'과 웬만한 동사는 대체로 띄어 쓴다. 그러니 '잘하다'와 같이 굳이 붙은 경우가 예외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누군가는 이렇게 살고 다른 누군가는 저렇게 살고, 그런 일일 뿐이다. 다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다. 보통, 모두가 서로 친하지 않으니 ‘잘 먹다’ 등으로 떨어져서 산다. 특별히 친해서 ‘잘하다’로 붙어살겠다면 존중해주자. 그들의 선택이다. 축하해준다면 더욱 좋겠다.




그런데 가끔, 그 선택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잘''하다'는 서로 마음이 맞아서, 서로 당겨서 결합했을까. 이거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하다’의 수작이 아닐까. '하다'가 마치 조사와 어미가 그랬듯이, 성격이 의존적이어서 아무나 끌어당긴 것 아닌가. 의심은 항상 갑작스레 피어나 우리를 뒤덮는다. 무척 곤혹스럽다.


예컨대, ‘못하다’가 있다. ‘하다’는 꼭 ‘잘’하고만 친해지는 것이 아니다. '못'과도 붙는다. '하다'는 슬슬 끌려오기만 하면 그게 ‘잘’이든 ‘못’이든 누구든 좋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별로다.


‘하다’가 아주 자주 쓰이는 동사이기도 하니, 더욱 의구심이 짙어진다. 실제로, ‘하다’와 같이 다양한 맥락에서 전방위적으로 활약하는 친구는 단독자로서의 위상을 조금씩 잃어버린다. 여전히 동사이기는 한데, 가끔은 과연 그런가, ‘너는 정말 항상 동사로서 존재하는가’하고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게 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공부하다', '덜컹덜컹하다’ 등이 있다. ‘-하다’가 접미사로서 다른 단어, 즉 '공부', '덜컹덜컹' 등과 붙은 경우다. '-하다'는 명사, 의성어, 부사, 어근 등 오만 곳에 붙어 새로운 단어를 생성한다. 위와 같이, '공부'라는 단어에 갑자기 '-하다'가 철썩 붙어 '공부하다'라는 새로운 단어가 탄생해버리고는 한다. 원래 '하다'는 동사인데, 어느새 ‘-하다’라는 접미사가 되어서는 동사나 형용사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마치 '하다'가 ‘동사 직군’의 일선에서 은퇴하여 교육원으로 물러나 후학 동사들을 육성하는 모습이다.


이렇듯 '하다' 모습을 바꾸기도 하며 다른 단어를 자주 당기고 다닌다. '하다'가 내뿜는 당기는 힘이 비교적 강력해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잘하다'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잘'은 그저 '하다'에게 끌려오고 만 것일까? 실은 둘이 썩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다'가 억지로 당겨서 붙어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꼭 그렇지가 않다. 원래 '잘''잘 먹다' 등에서 보듯, 보통은 다른 단어와 떨어져 다닌다. 하지만 친구가 필요하다 싶으면 맞는 상대를 골라 당겨서 사귀기도 한다. 그 예가 ‘잘생기다’, ‘잘나다’다. '잘'에게도 제 나름의 취향이 있어서, '먹다'와는 서로 썩 끌리지 않지만, ‘생기다’, '나다'와는 붙여 쓸 정도로 친해진다. '잘''하다' 없이는 도저히 못 사는, 그런 불안한 존재가 아니다. '잘'도 친구가 여럿이다.


그러니 ‘잘’ 자신에게도 주체적으로 당기는 힘이 있다. '잘'에게 자신을 믿고 누구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낯선 단어와는 거리를 두고, 친한 단어만을 당긴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누군가를 선택한다. 그것은 '하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잘하다''잘''하다'가 그렇게 서로를 믿고 당긴 특수한 결과다. 다른 결합과 마찬가지로, '잘하다' 역시 특별하고 유일한 결합이다. 또한 그 결합으로부터 '잘''하다' 경계를 잃고, 다시 말해 띄어쓰기를 하지 않게 되고, 하나로 융합다. 그렇게 새로이 하나 된 '잘하다' 새로운 의미를 담는다. 단어의 탄생이다.


그러니 재밌지 않나. 규범적으로 단어 모두가 서로 멀어지는 사이에도 누군가는 함께할 상대를 찾아다닌다. 서로 당기고 붙어서,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예외로 붙은 단어들이 무척 반갑다. 규범도 재밌고, 예외도 재밌다.




보다 보니 이렇다. 단어와 단어는 서로 밀고 당기고 하는데, 조사와 어미를 제외하면, 누군가를 꼭 밀고 누군가를 꼭 당기는 마땅한 법칙이 그리 대단치만은 않다. 떨어졌다가도 붙고, 붙었나 하면 떨어져 있고. 늘 떨어지라는 규범과 가끔씩 붙는 예외가 동시에 있다.


사람도 그렇지. 때론 밀어내고 때론 당긴다. 제 멋대로 산다. 때론 조사처럼 수동적이고, 때론 동사처럼 활발하고, 때론 명사처럼 굳건하다. 의존하면서도 자존한다. 어떤 이와는 거리를 두면서 어떤 이와는 친해진다. 따로 떨어짐으로써 독존하며, 함께함으로써 새로워진다. 제 멋대로다. 성향은 있어도, 항상 그렇지는 않아. 꼭 하나 만일 이유가 없다.


사람 사이가 그렇듯, 단어 역시 단어 by 단어, 단어들이 서로 관계 맺기 나름이다. 하나의 법칙으로 이 복잡한 세상이 모두 설명된다면 좋을 텐데. 쉽지 않다. 각자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서 또 오래 살펴야 겨우 한 조각을 이해하고, 그 조각조각을 맞춰 그나마 넓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래서 띄어쓰기는 참 어렵다. 띄어 쓰기도 하고 띄어쓰기도 쓴다니. 가끔 참 너무하지. 때려치우고도 싶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저들의 모습이라니 어쩌겠나. 어려워도 해보고, 너무 어려우면 쉬면서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또 아주 가끔은, 어려워서 사는 게 재밌기도 하니까.





브런치 독자님들께


안녕하세요, 브런치를 처음 시작한 이이주입니다. 브런치에 적응하는 동안만 이렇게 글쓴이의 말을 남길까 합니다.


천천히, 오래 쓰고 싶습니다.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 있는 것을 주로 씁니다. 이렇게 우리말에 대한 성근 이야기도 가끔 합니다. 소설을 읽고 쓰고 싶어서, 서평과 엽편도 올릴 것 같아요.


이 글은 학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 재미로만 읽어주세요. 특히 조사와 어미의 단어 지위와 관련해서는 학계에서 분분히 논의해왔으나 저는 그 아주 일부만을 이야기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학교 문법에서는 조사를 단어, 어미를 단어 아닌 것으로 배웠지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답니다. 조사, 어미를 단어로 보느냐 마느냐는 한국어를 어떤 구조의 언어로 볼 것이냐의 문제로 연결되므로 무척 재미있습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더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하루가 시작됐네요. 오늘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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