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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Feb 29. 2020

나는 골목책방에서 세상을 만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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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경력을 꼽는다면 글쎄 어떤 게 가장 큰 장점이었을까? 아마도 살아가는 일에 대한 현장 경험 누적이겠지. 아이를 낳고 돌보는 경험, 그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갖가지 변화무쌍한 환경, 시댁을 포함하는 문화적 갈등과 조율, 생로병사에 이르는 가족 돌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입장 변화까지 그 어떤 사람보다 ‘사는 일’ 전체를 골고루 경험하게 되니까. 그렇게 엄마로 지낸 경험들이 지금 운영하는 책방 살림살이에도 속속들이 도움이 되지. 이것도 다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거든. 그러니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언젠가 예행연습을 해본 느낌이 든달까.


남편이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대만에서 몇 년, 하와이에서 몇 년 도합 10년을 해외에서 지냈어. 가난한 유학생을 따라간 아내로서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시간을 쓰고 단기 직장을 개척해야 했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가게 점원으로 일했던 때도 바로 그때였어. 무엇보다 외국 생활의 단점은 우리말로 속 시원하게 소통을 할 수가 없다는 거야. 그럴 때 책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그런 고비를 만날 때마다 책과 함께 지냈던 거 같아.



전업주부라고 해도 내내 집안일만 하지는 않잖아. 단지 가정과 육아를 누구에게 온전히 맡길 수 없으니 원만한 생활을 위해 늘 집안 상황에 먼저 자기를 맞추는 게 버릇이 되었을 뿐이지. 오히려 나에겐 그런 조건이 더 행운이었어. 매번 상황에 맞추면서도 조금씩 내가 원하는 걸 새롭게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한 조직에 매어 정해진 일로만 직장 생활을 해왔던 사람보다 매 순간 주도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게 어쩌면 더 나에게 많은 가능성이 열어준 것이지. 그렇게 내 상황에 맞춰서 조금씩 하고 싶은 일을 늘려갔어.     


신혼 초에야 시간만 나면 돈 버는 데 급급했지. 어렵게 얻은 신혼집 대출을 갚는 게 급선무였거든. 애까지 업고 다니면서 온갖 새로운 일을 닥치는 대로 했어. 경제 활동을 하려다 보니 역시 잘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더군. 내가 잘하는 건 대부분 글 쓰는 일 아니면 책 읽는 일이었어. 나는 정말이지 평생 책과 함께 살았거든. 책이 언제나 나의 선생이었고 외로울 때도 친구가 되어주었지. 그러다 국문과까지 졸업한 거고.     


집값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허리가 좀 펴지더군. 2000년 즈음부터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좀 해도 되겠다 싶었어. 박물관 아카데미를 기웃거렸는데 회비가 비싸. 용기를 못 내고 머뭇댔더니 남편이 응원을 해주더군. 여태 고생했으니 이제 그 정도는 자신을 위해 투자해도 된다고. 그렇게 해서 박물관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어. 그게 시작이 되어 10년 동안 박물관의 회지 편집까지 하게 됐지. 박물관을 오가다 보니 또 미술작품을 설명해주는 도슨트가 멋져보이더군. 도슨트 과정을 배우고 직접 활동도 시작했지. 그 다음에는 평생의 테마였던 책으로 독서 교실을 열어볼까 싶어지더라. 마침 귀인을 만나게 됐어. 어떤 모임에서 만난 분이 뭘 하고 싶냐고 묻길래 독서 교실을 열어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 회사에 와서 시작을 해보라는 거야. 거짓말처럼 그런 식으로 뭘 하고 싶을 때마다 기회를 만나게 되더라고.   


   

겁이 나진 않았어. 새로운 일에 필요한 정보는 책을 찾아 읽으면서 지식을 넓혀가는데 익숙했거든. 이렇게 책이나 강의로 배운 것을 나는 언제나 글이나 말로 다시 내가 풀어낼 수 있도록 활동까지 해봐야 온전히 공부가 완성되는 기분이었어. 매사 직접 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거 같아, 나는. 그래서 그렇게도 다양한 일에 도전했던 거지. 공부 삼아서 말이야. 그런 경험들이 모두 이 책방을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어.   

   

작은 책방이라도 혼자 오롯이 운영하는 게 쉽지만은 않아. 하지만 너무 좋아. 내가 주인인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타협할 필요가 없잖아. 온전히 내 맘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서촌에 책방을 내겠다고 했을 때 남편도 반대를 하진 않았어. 오히려 가정 일에 밀려있던 아내의 평생 숙원사업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나 봐. 망해도 2년 정도의 가겟세만 손해를 보면 되겠다 싶었대. 그런데 의외로 내가 잘하고 있는 거지. 아직 한번도 집에서 돈을 갖다 쓰진 않았거든. 남편은 오히려 요즘은 주말에 책방 나가지 말고 자기와 같이 좀 놀아줬으면 하는 눈치야.    


  

후회? 안 하지, 그럼. 이 공간 안에 갇힌 것 같아도 나는 책방 안에서 오히려 온갖 사람을 만나고 있어. 얼마 전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녀왔는데 오히려 그게 더 시들하더라고. 책방을 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인생을 깊게 여행하게 된 기분이야. 내년부터는 책방 운영보다 독서 토론에 더 집중하려고 해. 그들과 함께 또 새로운 뭔가를 기획하는 과정이 즐겁지. 앞으로 오래도록 책방 회원들과 함께 우리말로 아름답게 표현되는 어른스러운 생각들과 언어들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싶어.      


#골목책방 #서촌그책방 #선배주부 #지혜로운학교 #당사자연구


2019 서울시50플러스재단 당사자연구 <엄마경력을 살려 자기 일을 찾은 50+ 선배주부 성공사례> 보고서의 일부로, 서촌 그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50+선배주부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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