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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Apr 08. 2020

옛날 엄마와 지금 엄마의 징검다리로

사람여행

나는 25살에 결혼했어. 그땐 직업군인이었던 친정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려고 결혼도 빨리 했던 것 같아. 좀 무서운 분이셨거든. 하하. 어릴 땐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전국을 수도 없이 이사 다녔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아예 부모와 떨어져서 광주에서 내가 동생들을 돌보며 학교를 다녔어.


그때부터 미리 엄마처럼 살게 된 거 같아. 함께 사는 동생들한테 빨래 한 번 안 시켰어. 집안일도 물론. 그걸 불만해 본 일조차 없었어. 외려 내가 동생들을 먼저 자식 돌보듯이 하며 살았지. 그 아이들은 모두 잘 자라 다들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어. 가끔 동생들은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곤 했었지. 항상 만나면 좋은 세상 보여주려고 좋은 거 사주고 좋은 데 데려가곤 했지. 나는 한 번도 내가 동생들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살림하고 누구를 보살피는 것들이 내 적성에 잘 맞았던 거지.     


나는 언제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정성을 다하고 의무에 충실하려는 성격이야. 원래부터 낙천적이고 성격도 유순해서 뭘 억지로 주장해본 일도 없어. 그런 내가 시집을 갔더니 시아버님이 만나자마자 그러시는 거라. ‘앞으로 우리 집 손님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건 모두 네 책임이다’라고. 여섯 딸에 외아들이던 남편이니 정말 그 말이 무겁더라고. 시아버지 말씀을 듣고서 정신을 바짝 차렸던 거 같아.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손님들 대접이 소문나게 후하신 분이었어. 새벽마다 일어나 댓돌에 놓인 신발 숫자를 세어보고 나서야 그에 맞춰 아침밥을 짓곤 하셨대. 그만큼 이 집은 손님에게 아예 열려있던 집이었지.     


어떻게 보면 난 엄마의 역할보다는 며느리의 역할에 더 충실했던 거 같아. 며느리 역할에 충실한 것도 어찌 보면 자식을 키워내야 하는 어미로서의 의무라고 볼수도 있지만.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도 있지만 사교성도 있고 노는 것도 좋아하는 분이셨어. 그에 비해 나는 꼼꼼하면서도 내성적이고 우직한 면이 있었지. 어머님에게 딱 맞는 며느리는 아니었을 거 같아. 그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지냈지. 마지막에는 대소변도 못 가리고 치매가 생기셔서 막말도 많이 해대고 그랬어.      


자식들조차도 이 엄마의 고생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는데 정작 나는 그런 게 그리 오래도록 섭섭하진 않더라고. 애초부터 나는 하룻밤 울고 나면 속상한 일도 다 사라지는 평탄한 성격이었던 거 같아. 하지만 시부모님의 노후를 지키면서 인간의 마지막 장면을 너무나 낱낱이 봐버린 것 같아. 내 앞에 놓여있는 죽음과 노환의 실체를 속속들이 알고 나니 외려 미래에 대한 환상이 생기질 않아.      


그렇게 한동안 집안에 계신 노인들을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 적이 있었어. 까딱 잘못하면 목욕탕에 앉아서 졸다가 그대로 물에 빠져 죽겠더라고. 그런 위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끄덕이며 졸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도 짠했어. 순한 성격이었는데 정말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되니 ‘나도 내 맘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더라고. 그때는 꼭 내가 깃대에 매달린 너덜너덜한 깃발 같은 느낌이었거든.      




어떤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일이 있었어. 그날 말했지. 다음 생에 태어나면 그땐 정말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그분이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그러시더라. 다음번에 꼭 다시 태어날 보장이 없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이생에서 실천하며 살아보라고. 그 말이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이상하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 사람들은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마음 붙잡기가 더 힘들더라구. 그때부터 그 말을 생각해가며 하나씩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해보게 됐지. 그렇게 조금이라도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다가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르게 된 거 같아.      


요즘엔 정말 친정부모님께 죄송스러워. 내가 시부모님한테 보다 훨씬 못하고 살거든. 너무 진을 뺐나봐. 50이 될 때까지 그러고 살았더니 이젠 더 이상 그럴 마음이 안 생기더라. 지금은 나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많아졌거든. 지나고 보니 시어른에게는 의무로 했었던 거 같아. 책임이라는 게 참 무섭지. 시댁 식구들은 다 명랑하면서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셨는데 그때도 나는 도리만 생각하는 답답한 성격이었어. 이제 와서 생각하니 괜히 혼자 어렵게 산 거 같아. 결국 내 성격이 자초한 일이겠지 뭐.     



시어른들로 인해 한참 힘들었던 시절, 인터넷에서 다음 칼럼 서비스가 시작되었지. 조카의 안내로 들어가 봤는데 정말 별천지였어. 거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들어가서 내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어. 너무 외로웠거든. 혼자 하소연도 하고 일기도 쓰고, 사진도 올리고, 음악도 걸고, 태그라는 것도 그때 처음 배웠지. 그런데 어느 날 그 블로그가 해킹당해 더이상 접속 자체가 불가능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지. 다행히 남편이 내 글을 모아 책을 내려고 계속 다운을 받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야.      


그런 중에 카카오스토리 SNS 서비스가 다시 생겼어. 거기에 다시 시작했지. 우연히 남편의 명절 선물로 만든 양갱 사진을 올렸는데 누군가 그걸 보고 메시지가 온 거야. 가르쳐달라고. 그게 시작이었지.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가르쳤어. 우리집 부엌 한 귀퉁이에서. 처음엔 누가 나에게 돈을 주고 양갱하는 법을 배우러 오겠나 싶었는데 그게 어느덧 벌써 6년이네. 늘 외부손님으로 북적거리던 집이었기에 가족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준 거 같아. 올해 바로 옆집이 매물로 나와서 나만의 공방을 만들기까지 5년이나 집으로 밀려오는 손님을 참아줬으니 가족들도 고맙지.      


나는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에게는 인생 상담도 해주고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쓰는 편이야. 그게 나의 성격인 것 같아. 동생에게도 시부모님께도. 남편은 세상을 다 구해내느라 저렇게 바쁘다고 가끔 놀리지만, 손님에게 무조건 정성을 다하라는 엄명은 남편의 부모님에게 배운 건데 뭐. 천만다행으로 남편 은퇴를 앞두고 바로 옆집이 매물로 나와 나만의 공간을 만들게 되었어. 아들이 여물게 모아놓은 돈을 투자했고, 남편도 보탰어. 물론 나도 그간 모아놓은 돈으로 인테리어 비용을 댔지. 내 사업이긴 하지만 가족 모두 힘을 합쳐주고 있어. 혼자라도 혼자가 아닌 느낌이야. 그런 게 여태 엄마의 자리를 오롯이 지켜낸 덕분이겠지.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미리 계획을 해서 시작한 게 아니야. 그냥 흘러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귀가 맞춰진 거지. 내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로 이번에는 남편의 노후 설계를 도와줄 수가 있었지. 남편은 공무원이니 연금이 있어 당장 생계 걱정은 없어. 사람들은 돈 걱정만 없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당해보면 그렇질 않아. 그 많은 시간 동안 도대체 뭘 하면서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지가 더 큰 일이지. 그래서 이런 시기에는 어떤 것에 재미를 느끼고 몰두할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해.      


내 경험으로 보자면 무조건 취미로만 하면 금방 싫증이 날 수 있겠더라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이라도 돈이 벌려야 훨씬 재미가 나고 열심을 내게 되거든. 목공을 배우러 다니는 남편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지. 작품성도 좋지만 실용적이고도 아름다운 도마를 좀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일단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 모두 살림과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니 판매와 연결될 가능성도 있고. 그런 식으로 저절로 코칭을 하게 되더라고. 물론 나에게 찾아오는 많은 엄마들에게도 그러지.     


나는 성격상 한번 시작하면 대충 끝내는 게 없어. 끝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완성도를 높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편이지. 그런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하면 무조건 믿고 오는 것 같아. 고맙지. 나는 19세기 20세기 문화에서 지낸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요즘 사람한테 그런 삶을 강요할 순 없어. 또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적어도 옛날과 현재의 문화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는 있지. 옛날 살림 이야기도 들려주고 부모에게 배운 솜씨를 다시 젊은 엄마에게 전수해주는 거지.      


혼자 실험하며 제대로 가르칠 것을 만드는 부엌


마침 사범대를 나와서 그런가, 나는 물건을 파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게 더 성정에 맞더라고. 사람들은 물건을 같이 팔면 더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나 혼자 둘 다 매진할 여력이 안 돼. 판매는 안 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방법만 가르쳐주지. 그래야 나에게 배워간 사람들이 다시 그 기술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을 거 아냐. 엄마들이 여기서 배워 가지고 그 걸로 창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나는 계보도 없는 사람이야. 순전히 나만의 방식으로 혼자 개척한 거지. 처음에는 그래서 움츠러들기도 하고 남의 칭찬과 비판에도 많이 흔들렸어. 하지만 지금은 내 스타일대로 밀고 나가는 담력이 생겼지. 남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 번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방법이기 때문에 어떤 질문이 와도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장점도 있지.    

 

남편이 가끔 농담을 해. 내 어머님한테 배운 노하우를 써먹을 때는 자기한테 기술료를 조금만 떼어달라고. 아닌 게 아니라 시어머니한테 살림을 정말 많이 배웠어. 어머니는 단순한 재료로도 음식을 쉽게 잘 만드는 분이셨어. 손님이 많은 날은 밥을 열 번이나 차려내는 적도 있었지. 그걸 다 따라 하면서도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 나도 적임자였나 봐. 그런 것들이 이젠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됐지.      


돌아보면 나는 굳이 내 삶에 닥치는 상황에 대항하고 바꾸려 하기보다는 순응하면서 살아왔던 거 같아. 그렇게 살아도 저절로 기회가 오고 내 자리가 생기더군. 그 모든 게 그냥 운이겠지 싶어. 집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이 없기도 해. 아주 고지식하지. 사춘기를 겪으며 반항하는 아들을 보며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았지. 그 아이 눈에 아빠는 엄마만 생고생시키는 나쁜 놈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렇게 다들 생각했으니 이 엄마를 늘 손해 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많이들 도와준 거겠지만.     


애들한테 미안한 일은 나는 언제나 엄마로서 먼저 존재한 게 아니라 며느리로서 일이 더 우선이었다는 점이야. 아이들은 언제나 순서가 나중으로 밀렸지. 너무 바빠서 아이들한테 관심을 기울일 새가 없었어. 그런 와중에도 엄마로서 꼭 해주려고 했던 것은 밥이었어. 지금도 아이들이 집에 오면 먹고 싶은 거 말하라고 주문을 받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주문대로 다 따로따로 만들어주지. 남편은 사서 고생한다고 질색을 하는데 나는 그것만큼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거니까 기꺼이 해주고 싶어. 정말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지도 않아.      


외려 부모에 대한 의무감이 힘들었지. 사람들은 의무감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저절로 힘이 생기는 것 같아. 종일토록 일을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아. 의무로 하는 게 아니라 재량권이 있으니까. 젊었을 땐 그렇게 못 살았어. 부모님과 시어른께 맞추면서 살았지. 지금은 아주 나한테 딱 맞는 옷을 내 스스로 선택해서 입고 있는 느낌이야. 내 형편에 맞게 조절할 수 있으니까.      

아 참, 경제력이 생겨서 더 좋은 거 같아. 경제적 독립을 한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지. 여지껏 돈 때문에 특별히 못했던 일도 없었지만, 동생들에게 늘 미안했거든. 나에게 부담 안 지우려고 자기들이 낼 때마다 사람 노릇 못하는 것처럼 민망했거든. 이젠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졌어. 지금도 나는 생계형으로 돈을 버는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주위에 야박하지 않게 베풀 수도 있지. 굳이 많은 돈이 필요하지도 않고. 크게 돈 욕심을 내며 사람답지 않게 사는 것보다는 이런 상황을 즐겨가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돈 버는 일을 의무로 해왔던 남편들을 생각하면 또 짠하지. 돈을 버는 일도 좋지만 그런 게 의무가 될 때는 내가 예전에 며느리 노릇이 그랬던 것처럼 그만큼 더 힘들었을 거 아냐. 그 부분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고맙지. 많은 사람들은 내게 지금 정도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사업을 크게 확장해도 괜찮을 거 같다고 해. 하지만 그러다 사업이 커져서 거꾸로 사업이 나의 주인이 될까 봐 경계하게 돼. 남편도 다행히 돈보다는 내가 재미있게 살 정도로만 일을 키우라고 조언하는 편이고.     


돌아보면 계획대로 애쓰면서 살아낸 것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서서히 아귀가 맞춰진 느낌이야. 아마도 그런 게 사는 일 아닐까. 내가 용트림을 한다고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저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복을 가져왔구나 싶어.     



이 글은 2019 서울시50플러스재단 당사자연구 <엄마경력을 살려 자기 일을 찾은 50+ 선배주부 성공사례> 보고서의 일부로, 광주에서 살림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50+선배주부 곽애신님과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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