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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제니 May 20. 2023

어느 폴댄서의 죽음

May he rest in peace

여느 때처럼 토요일 아침 수업을 들으러 폴댄스 학원에 갔다. 늘 수업 시작하기 전에 준비하면서 스몰톡을 나누는데, 그날은 선생님이 표정도 좀 어둡고 목소리도 차분했다.


"오늘 수업이 끝난 후에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 Mike를 기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제가 마실 것과 먹을 것들을 준비해왔어요."




'마이크?  마이크??'












내가 마이크를 만난 건 지난 3월 초, 딱 한 번뿐이었다.


화요일 저녁 수업을 하는 강사의 티칭 스타일이 나와 잘 맞지 않아서 다른 날 다른 강사의 수업을 들어보기로 결심한 터였다. 토요일 아침, 주말의 늦잠을 포기하고 학원으로 향했다. 강한 남부 억양을 쓰는 서글서글한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주말 아침인데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폴마다 수강생으로 꽉 차 있었다.


강사부터 수강생까지 모두 여자들인데 남자가 딱 한 명 있었다. 그가 마이크였다. 청일점인 것만으로도 눈에 띄었는데 심지어 이 분, 아무리 젊게 봐도 우리 아빠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다. 키가 거의 190cm는 되어 보였고 아주 호리호리하게 말랐다. 얼굴에도 몸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리고 다른 폴댄서들처럼 속옷같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물론 여자들은 상의까지 입고 있었지만). 그것도 빨간색, 파란색이 섞인 메탈릭한 재질로 된 반짝이는 팬티를!!!


미국에서 폴댄스 학원에 다니면서 새삼 놀랐던 점은 정말 다양한 몸매, 그리고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온다는 거였다. 정작 한국에서 폴댄스 학원을 다녀보지 않았으니 실제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수많은 폴댄서들은 모두 너무나 완벽한 바디라인을 갖고 있었다. 또한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강사들은 거의 모두!


그런데 여기는 일단 강사들부터 소위 '펑퍼짐한 몸매'였고 나이도 젊은 사람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내가 이 학원을 다니면서 4명의 강사를 만났는데 한 명은 나보다 어리거나 비슷해보였고, 세 명은 나보다 확실히 나이가 많았다. 그 셋 중 두 명은 심지어 잡담을 할 때마다 메노포즈에 대해 얘기했다. 폐경기를 겪으면서 몸이 얼마나 제멋대로 변하는지.


각설하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폴댄스를 배우는 동안에도 남자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폴댄스 학원에서 만난 남자가 할아버지뻘의 노인이라니. 그는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냈다. 그의 옷차림이나 몸짓, 그리고 강사와 다른 수강생들과의 관계를 보아하니 폴을 무척 오래 탄 분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이제서야 처음 본 게 놀라울 정도로 그는 이 학원의 '핵인싸'였다!


어쩌다보니 나는 마이크 옆에 서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먼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Hi, I'm Mike, nice to meet you. Welcome to Saturday's class. What's your name?" 웃으며 내 이름은 제니고, 나도 만나서 반갑다고 화답했다. 캐런의 열정적인 강습을 듣다보니 정신없이 한 시간이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주섬주섬 옷 챙겨입고 정리하는데 마이크가 가까이 오더니 또 말을 걸었다.


"옆에서 보니 abs가 남다르더군요.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평소에도 운동을 많이 하는 분이란 걸. 폴댄스를 시작한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작년 10월에 시작했으니 이제 다섯 달 정도 됐어요."


"그렇군요. 너무 잘하고 있어요. 꾸준히 하면 분명히 훌륭한 폴댄서가 될 거예요. 6개월만 지나도 당신은 정말 멋진 폴댄서가 되어 있을 거예요. 오늘도 아주 잘했어요."




그 동안 여러 강사의 수업을 들으면서 "You did a great job" 정도의 칭찬은 많이 들었지만, 나의 미래를 확언하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수업을 들을 때나 끝난 후나 수강생들은 모두 지쳐서 정신도 없고 서로 얘기를 잘 안 한다. 그런데 이렇게 폴력(pole歷)이 상당히 돼보이는 분에게 이런 칭찬을 들으니 아주 고무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처음 만난 선생님, 캐런의 티칭이 너무 좋아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던 차였다. 앞으로 쭉 토요일 수업에 와야지- 다짐도 했었는데, 이렇게 스윗하고 젠틀한 할아버지까지 있다니!!


토요일 캐런의 수업을 처음 들었는데 정말 잘 가르쳐주셔서 좋았다고 얘기하니, 마이크도 동의하며 캐런은 단순히 동작을 보여주고 따라하게 하는 게 아니라, 몸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하나 하나 분절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준다면서 정말 좋은 선생님이니 잘 배우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이름이 뭐였는지 묻고는 "It was really nice to meet you today. Hope to see you again" 이라고 인사하고 떠났다.












수업이 끝나고 주섬주섬 정리한 후에 캐런이 준비해온 음료와 과자, 치즈, 팝콘 등을 적당히 펼쳐놓고 모두 잔을 채웠다. 캐런이 잔을 높이 들며 "For Mike," 라고 짧게 말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수강생들도 잔을 들며 "For Mike. May he rest in peace" 라고 받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두 달 전에 만났는데. 너무나 정정했는데. 함께 폴을 탔는데! 갑자기 왜?!


그제야 옆에 앉은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What happend?"

"He got a heart attack.."


더 자세히는 물을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병이 있었는지 어땠는지 그런 건 전혀 모른다. 그저 두 달 전에 단 한 번의 만남에서 나에게 가장 따뜻하고 힘찬 응원의 말을 해준 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다음 수업을 들으러 조금 일찍 온 사람이 차려진 음식과 우리들을 번갈아보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What are we celebrating? (무엇을 축하하는 자리인가요?)"

나한테 물은 것도 아니었고 내가 대답할 것도 아니었지만 무척 당황했다. '어.. 이거 축하하는 자리가 아닌데..'

하지만 캐런은 전혀 주저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We are celebrating the life of our dear friend Mike who passed away a few days ago.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우리의 소중한 친구, 마이크의 삶을 기리는 자리랍니다)"


우리는 둘러앉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했다. 마이크는 어떤 이에겐 Pole daddy였고, 어떤 이에겐 오랜 벗이었고, 어떤 이에겐 멋진 동료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마이크와의 찰나 같았던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내가 그를 '안다'고 할 수 없는데도 마치 오래도록 잘 알던 사람이 떠난 것 같은 상실감과 허망함이 찾아왔고 뒤따라 인생의 무상함이 확 밀려왔다. 인간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연습실 한 구석에 놓인 테이블 위엔 마이크의 멋진 사진과 그를 아낀 이들이 남긴 마지막 인사가 적혀있었다. 나도 마음 속으로 작별 인사를 보냈다. 처음 본 나에게 가장 포근한 미소로 가장 다정한 말을 건네준, 많은 이들의 폴 대디, 마이크. 부디 평안히 잠들길.








Rest in peace, dear M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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