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낭만생활
거듭되는 구매 경험에도 살 때마다 짜릿하게 자각한다. 아 이게 어른이구나. 그래, 나는 이것을 위해 돈을 벌어 온 것이었다. [본문 - 6p]
가끔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보며, ‘하여간에 나는 이런 인간인가’ 투명하게 읽히는 것만 같아 실소를 짓는다. 어쩜 내 물건들은 죄다 나 같은 걸까. 내 가방과 옷가지, 컴퓨터와 각종 전자기기, 로봇 장난감들과 기념품, 책 등 어느 하나도 나로부터 벗어나는 게 없다. 어떤 것엔 삶이, 습관이, 쓸모가, 동경이, 취향이 대체로는 복수로 때론 단수로 담겨 있다. 그래선지 수개월에서 수년이 지나 쓸모를 다해 버린 물건들을 버릴 때가 되면 괜스레 섭섭함이 든다. [본문 – 45p]
취미에 오롯하게 몰입하면서 생각을 비우고 일과 거리 두는 시간이 길게 생기니 오히려 일에 대한 몰입도와 집중도가 높아졌다. 조리하는 시간 동안 내 책상에는 조립에 수반되는 각종 부산물로 어지러워 졌으나 머릿속만은 말끔하게 청소된 책상 같아졌다. 일이 일상생활을 야금야금 잡아먹는 걸 멈추게 하고 일과 적절하게 거리를 두니 일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게 된 건 덤이다. [본문 - 66p]
사는 건 게임에서 경험치를 쌓고 스킬을 찍는 것과는 다르다. 게임 속 캐릭터는 성장이 눈에 보이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쌓아온 경험이나 성취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체감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엇비슷한 일들을 깎고 다듬고 조립하는 일을 무수하게 반복해 가다 보면 알게 모르게 쌓인다. [본문 – 86p]
매사 별 관심 없다는 척 관조하며 미지근한 태도를 장착하고 사는 건 아무래도 재미없다. 남들 신나서 웃고 방방 뛰는데 체면 생각하고 표정 관리하며 앉아 있으면 지루한 어른이 될 뿐이다. [본문 – 116p]
좋아하는 걸 보면 체면도 잊게 되는 것이겠지. 남의 시선이야 아무렴 어때, 가끔 부끄러워지더라도 매사 진심일 때가 좋다. 나이를 먹고도 저렇게 마냥 반짝반짝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본문 – 117p]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취미 전성시대’였다. 독서, 통기타, 일렉기타, 프라모델, 영화감상, 애니, 방송댄스, 뜨개질, 위빙, 모형, 요가, 사진 등으로 수집의 역사는 제외하고도 손가락을 금새 넘어간다. 성인이 된 나는 ‘으른의 맛’을 제대로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고 싶은, 하고 싶은 걸 명확하게 알아서 경험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해보고, 아님 말지. 어차피 이것도 경험인데 하며 겁 없이 시도한 일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까지 쭉 유지해 오고 있는 취미는 몇 안되지만 20대의 경험이 취향과 경험의 영역을 넓혀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깟 취미가 절실해서]는 프라모델을 했던 나에게는 꽤 많은 동질감을 주는 책이다. 도색 할 때의 어려움이나 내 취미를 외부에 드러내기 힘들었다는 부분에서는 크게 웃었다. 한 쪽 팔 만들면 다른 한 쪽 만들기 싫어진다는 부분도 매우 공감했다. 로봇 얼굴로 싸우는 어른들 부분도 재미있었다.
‘그깟’ 취미는 확실히 중요하다. 좋은 취미는 숨통을 틔어준다. 하루 종일 일 때문에 꽉 막힌 머릿속에 윤활유를 넣은 것처럼 부드러운 사고를 할 수 있게 이어준다. 취미를 위한 소비를 할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팍팍한 삶에 정말 좋아하는 일 하나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채우는 삶이었다면, 비우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신기한 건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쓰는!), 일도 아닌데 내 시간과 체력과 열정을 기꺼이 쓰면서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취미는 나를 알아가는 한 과정이다. 당신의 취미는 무엇인가? 또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