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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sun Kim 김희선 Aug 20. 2019

엉덩이에서 일 뽑아내기

실행 implementation의 드러움(?)에 대해서

불치병과 자가진단

미루기(procrastination)는 정말 나의 오래된 불치병이다. 온갖 딴짓을 다하다가 시험이 내일로 닥쳐야 시험 공부에 진도가 나가던 중학교때 독서실 라이프로부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정말 끈질기게도 들러붙어 있는 오~래된 지병이다. 지난 주만 해도 그래. 별로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진도가 너무 안나가는 거다. 창을 띄워놓고 컴퓨터 앞에서 시간은 많이 보냈으나 해야하는 일의 크기나 중요도에 비해 볼때 진짜 한심하게 진도가 안나갔다. 이거 해야지 하고 시간을 잡아놓고 딴 웹질을 하거나, 갑자기 정신없이 더러운 부엌이 너무 치우고 싶어지거나, 최근에 주문한 상품이 왜 도착하지 않는지 갑자기 궁금해지거나, 며칠이나 닦아주지 않은 우리 개의 이빨이 걱정되거나 하는 식으로. 좀 진지하게 다음 스텝을 밟아볼까 하면 피로가 엄습하여 꼭 자야만 되겠거나, 애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거나, 어차피 곧 다른 걸 해야 하는 시간이 될 것이므로 시작도 못하고 그랬다.


물론 이 병증에 가장 합당한 치료는 데드라인이었다. 그나마 지금 이만큼이라도 이루고 사는 건 그래도 이 미루기 버릇이 데드라인이 오면 그나마 효율높게 후다닥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긴 해서라서. 그리고 A일이 하기 싫을 때 더 하기 싫은 일 B를 만들면 A를 해결하게 되기 때문이라서…


심지어는 오랜 패턴 관찰로 내가 왜 미루기 모드로 들어가는지도 안다. 난 이해가 어렵거나 에너지가 빨리게 생겼거나 맘에 걸리는 일이 있거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안 보일때 일단 회피 모드로 들어가는데, 이 와중에 약간의 완벽주의 기질도 있어서 내가 한방에 그럴싸하게 해낼 수 없을 거 같으면 시작도 하기가 싫은 거다. 그리고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원반돌리기 하듯 돌리고 있어서(?) 서로 얽히는 일이 너무 많아져 뭐라도 미루기모드에 걸리면 죄다 떨어져 와장창 깨지거나 아예 시작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선순환 루프에 들어가면 엄청 효율적으로 착착착 일을 진행할 수 있지만, 뭔가 막히면 진짜 대환장루프. 일단 활성화 되고 나면 쫌 근사한 결과물이 나오지만, 그 플로우에 올라타기까지 활성에너지가 정말정말X100 많이 들어가는 것.


엉덩이로 일하기

그래서 내가 제일 존경하고 신기해 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조금조금씩 뭔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 나는 가시적으로 그렇게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뿅 하고 내놓는 것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디자인 동네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내내 겔겔대며 정리안된 정보들만 주변에 둥둥 띄워 복잡궤도를 돌리다가도 어느순간 빅뱅을 이뤄 좋은 제품기획서 하나 뽑아내면 장땡인 PM(제품매니저/기획자) 문화에서 자라서,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딴짓 딴짓으로 (죄책감이 양념으로 가미된) 시간의 탕진잼을 즐기다가 밤을 새면서 딱 십이운성이 천기가 맞아 일렬로 늘어서고 클릭!하는 그 순간을 만나면 나를 잊고 잠을 잊고 거의 반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일 해내는 걸 즐기기까지 했다. 그게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더이상 그렇게 일 할 수 없게 되기까지는.


시간의 절대량 부족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 왔다. 그 전에는 시간 탕진잼을 즐긴 뒤 내가 자는 시간을 줄이면 되는 것이었다면, 아이의 요구와 필요는 독재적이며 나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시간은 더이상 나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할 것이 밀려 있어도, 아이가 엄마 찾으면서 울면서 보채면 옆에 누워 재워주러 들어가야 했다. 내일이 데드라인이건 말건 아이의 열감기는 시간 따위 몰랐다. 계획이라는 것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했다.


그런 뒤에는 일의 절대량이 가중되었다. 지난번 회사의 마지막 18개월 정도는 코파운더로서 CPO(제품최고책임자)로서 커버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회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집에 가는 순간까지 사람들이 계속 나를 찾는 미팅 애프터 미팅이라서 진짜로 내가 혼자서 해야하는 고독한 일들은 밤중에 애재우고 나서 집에서 밤새면서 했는데 (물론 그 에너지 끌어모으기의 능선을 못넘어서 일 못하고 자버린 때가 많았다), 그때 일은 머리가 하는 것도 손이 하는 것도 아닌 엉덩이가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진득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들이 진짜 중요한 일이구나. 그래서 요는 어떻게 하면 1초에도 수십개씩 핑계를 생각해내고 들썩이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놓을 수 있는가란 말이지.


내 지인 중에 자기 아버지가 스페인에서 유명한 화가였던 사람이 있는데, 그 돌아가신 아버지의 작업 이야기를 하면서 해준 이야기가, 화가면 뭔가 창의력이 폭발하여 스튜디오에서 영감에 사로잡혀서 그림을 몰두해서 그릴 것 같지만, 사실 자기 아버지는 매일매일 꼬박꼬박 오전 몇시까지는 스튜디오에서 캔버스 앞에 앉는다라는 창작의 룰이 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예술적 영감조차도 반복과 근면과 점진적 개선에서 온다고.


과학고를 다닐때 주변에 천재가 많았고 어릴때는 평소 공부 안해도 시험 전에 영감이 벼락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는 번개타입 천재를 동경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보니까 자기 컨디션과 무드와 생산성을 자기가 관리하고 꾸준한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꾸준한 아웃풋을 내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사용하는 법을 마스터 한 것을 바탕으로 훨씬 앞으로 치고 가는 것도 많이 봤다. “아이디어는 저렴하고 실행이야말로 모든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이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택틱스와 루틴

그래서 좀 유치하긴 하지만 소소한 것이 사실은 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뭘 할때 내 엉덩이가 의자에 잘 붙어 있게 되던가를 컴파일 해본다.

잘게 나누기: 일의 크기가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길이 안보이면 시작을 못하더라. 일단은 안개속에서 다음 발자국, 그 다음 발자국 떼는 곳까지만 마킹해도 일단 시작은 할 수 있다.

끄적대기: 일이 되어가는 상황에 대해서 어디다 쓰거나, 아니면 체크박스 리스트를 만들어 박스에 체크만 해도 (작은 성취!)일을 하고자 하는 모티베이션에 도움이 된다. 아 얇팍한 나의 동기여!

데드라인 주기: 데드라인은 나의 힘. 인위적인 데드라인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쪽팔기와 세트로 쓰기 좋다. 아주 작게는 25분 포모도로만 해도 효과가 있더라.

쪽 팔아놓기: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미리 장담을 해놓으면 쪽팔려서 안할 수 없는 상황이 나를 몰아준다.

리츄얼 만들기: 매일매일 반복해서 하는 리츄얼을 만들어서 리츄얼의 끝에 엉덩이를 의자에 오래 붙이도록 하는 것에서 효과를 좀 봤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스팟 조명을 켜고 앉으면 일기를 쓰고 싶어지는 것. 아침 9시 이전에 아침 루틴들을 끝내고 커피를 만들어서 책상 앞에 앉으면 일하고 싶어지는 것. 티팟에 좋아하는 티를 가득 만들어서 갖다두면 그거 다 마실때까지는 책상에 붙어 앉아있게 되는 것 (부작용: 화장실 가는 시간이 많이 든다).

비우기: 책상을 확 밀어버려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을때 자잘한 방해물들이 제거되어서 일에 집중이 되고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그래서 여행중 호텔에서나 평소에 커피숍에서 일하는 것이 더 잘되는 느낌. 일하다 말고 나가야 하거나 다른 것을 하지 않도록 스케쥴을 길게 비우는 것도 중요하다. Less is more.

물리적으로 따듯하게 편안하게: 따듯하게 입고, 양말을 신고, 집의 온도를 높여둘 것. 1도 차이로도 춥다는 기분이 들면 일할 마음이 사라지더라. 히트팩을 사용하여 응급 체온상승효과 가능. 중간중간 휴식과 수분 공급 중요.

정신적으로 기합넣기: 일단은 시간이 얼마나 유한한 자원인지를 계속 복기. 그리고 어렵고 불편하고 마음에 걸려서 손대지 못하는 것들을 머리부터 갖다 박을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를 유지하기.

기록하고 분석하기: 언제 왜 어느 정도로 에너지 레벨이 있고 생산성이 있던가를 기록하고 패턴을 찾아보기.


엉덩이 근육키우기

엉덩이 묵직하게 앉아서 집중하고 중요한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도 근육과 같아서 한번에 조금씩 꾸준히 단련하는 수 밖에 왕도가 없고 또 그렇게 단련된 근육이 근육메모리를 가지듯 한번 해보면 계속 더 잘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이제까지 인생에서 숏컷과 치트키를 다 써 버리고 이제 한 발 한 발 가는 수 밖에 없어진 플레이어처럼 ‘이젠 외부력이 없으니 내 근육 (이게 육체의 근육이건 정신의 근육이건)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이 딱 맞다. 


//원작성일 20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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