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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sun Kim 김희선 Oct 18. 2019

추진력의 원천

궁하면 통한다라는 메타-수단

//원작성일 2019년 1월 29일 (Medium에 썼던 글들을 브런치로 옮기는 중) 



최근에 부쩍 남들이 나한테 남다른 추진력이 있다고 말해줘서, 나도 몰랐지만 그게 나한테 꼭 있어줬으면 하는 바램에서 써본다. 나의 so called 추진력은 어디서 왔을 것 같은가를. 샅샅이 찾아보는 이 글을 쓰면 추진력이 내 속에서 찾아지고 굳건히 자리잡으실 것 같은 주술적인 기분으로.




1994년,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해 여름에 김일성 사망으로 한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이 물건 사재기를 한다는 뉴스에서 화장실 휴지가 사재기 품목으로 지명 되었는데, 그때 같이 보던 친구가 “참 사람들이 없으면 곤란한 걸 잘 안단 말야.”라고 했다. 몇십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는 건 내가 그 때 속으로 “휴지 같은 것으로 곤란함을 논하다니 얜 어려움이 뭔지 모르나보다.”라고 생각했던 것. 난 어릴때 집이 꽤 곤궁하던 시절도 있고, 더 곤궁했던 피난 시절 이야기도 엄마한테 항상 듣고 자라서 (엄마가 44년 부산 출생), 정말로 내가 어떤 상황에 몰리면 체면이고 위생이고 생각안하고 하나도 못할 것 없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어릴 때 사람(만)좋은 우리아빠가 서준 빚보증이 잘못되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곤궁했던 우리집은 엄마가 경제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시면서 조금씩 형편이 폈다. 공무원이다가 애 둘 낳고 집에 들어앉았던 우리 엄마는 우리가 조금 크자마자 뭐라도 해야겠다며 계몽사 책 외판원, 나드리 화장품 방판사원을 거쳐서, 자기가 다니던 서예학원을 인수해서 피아노 전공이던 사촌언니를 선생으로 채용하고 피아노 학원을 내셨다.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습득한 타이거 맘 기질과 사교성과 수완을 발휘해서 피아노 학원을 점점 키웠는데, 어느 한 시점에는 각각 원생들이 300명쯤씩 있는 피아노+미술학원을 두 개 운영하셨다. (나중에는 영어학원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다 쇠락했지만…) 어쨌든 이 모든 스텝들에 반대만 하던 간 작은 우리 아빠랑 차원이 다른 리스크 테이킹이었다. 그리고 부산의 명문 여고출신이지만 고졸인 것에 항상 속상해하던 우리 엄마는 딱 환갑이 되었을 때 유아교육과 대학을 가셔서 자기 딸보다도 더 어린 애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셨다. 부지를 사다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 유아교육과 전공을 바탕으로 유치원과 노인요양원을 묶은 재단을 만드셨을거다. 그 시절의 우리 엄마에게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에잇!”하면서 머리끈을 질끈 묶는 기합 같은 게 있었다. 이런 진취적이고 생활력 강한 엄마를 옆에서 보면서 자라온 것도 뭔가를 내 속에 차곡차곡 쌓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난 유학 어드미션을 1999년에 받았는데, 그때는 IMF 사태가 막 터진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 유학준비 하는 걸 가재미눈으로만 보시던 부모님이 집에서는 나올 돈이 없다고 엄숙하게 통보하셨다. 하는 수 없이 어드미션을 준 카네기멜론 대학원에는 입학은 내년에 할게요라며 미루어두고, 낙향하여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풀타임 과외선생으로 일해서 유학가 1년 학비를 내고 1년간 살 수 있는 돈을 모았다. 일단 1년을 버티면 어떻겐가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정말 하기 싫은 과외들을 하나하나씩 쳐낸다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버텼는데, 돌아보면 그 당시 아무리 IMF로 어려워도 고갱님들이 애들 과외는 시켰고, 1년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14.5%였으며,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모님은 나에게 금전적인 부담을 주지는 않으셨다. 나중에는 이렇게 1년분 모아서 갔다가 석사 1년차 다니고 돈 떨어지면 또 한국 돌아와서 1년 이렇게 하면 모아서 석사 2년차를 할 수 있겠지라고 배짱있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 당시는 너무 자괴감도 열등감도 불안감도 심했다.) 피츠버그에서 대학원을 1학년 다닌 뒤에 정말로 돈이 똑 떨어졌지만, 여름방학때 인턴했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6개월치, 학교에서 RA한 USPS 프로젝트에서 6개월치 정도 학비와 생활비가 나와서 어찌어찌 버텼다. 사실 부모님도 이래저래 소액이나마 부쳐 숨통을 틔워주셔서 꼭 내 힘으로 유학을 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운데, 그래도 이랬던 경험이 가난한 이방인으로 미국에서 살던 초기에는 꽤나 나의 정체성을 정의했다. 어떻게든 이래저래 얼기설기 (좀 돌아가기는 해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스스로 길을 만들어서 간 경험이 있으니까, 다음번에도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하는 근자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이미 궁하니까 통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인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Fake it till you make it”도 좋아하고, 어찌 됐든 진짜로 뭘 해야하는 상황이 되면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도 심정상 멀지 않다.


궁즉통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건 좀 더 긴 한자 성어더라고.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라는 뜻이라고 한다. 궁해졌다고 혹은 막혔다고 그냥 통하는 것은 아니고 변해야만 통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새긴 이 긴 한자성어를 반갑게 오래도록 지긋이 봤던 기억이 난다. 막히면 하던 대로 해선 어림도 없다. 못할 것이 없다는 다짐으로 다른 수단들을 시도해 봐야 한다는 걸 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찾아낸 통하는 수단은 아마도 그 수단 하나 만으로가 아니라 또 막히면 또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메타-수단을 이미 알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있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 메타-수단을 찾아본 적이 이미 있는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의 추진력은 그 메타-수단이 밑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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