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법

호주에서 셰프로 살면서, 내가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by 소연

3년 전, 길고 길었던 코로나의 시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호주 땅을 밟았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느껴지는 건 오래전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그 공기였다.

약간 차갑고, 바닷바람 섞인 특유의 향.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호주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자연스레 영주권을 위해 어떤 업을 선택해야 할지가 관건이 되었다.

그 고민 끝에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낯설지 않았던 '요리'를 택했다.


요리를 선택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시절 잠깐 주방에서 일하며 처음 칼을 잡았던 기억, 그때 운 좋게 사시미를 배웠던 경험.

그리고 먹는 걸 좋아한다는 단순한 취향.

무엇보다 영어가 서툴던 내게 주방은 상대적으로 언어 장벽이 낮아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의 큰 방향을 꽤 가벼운 이유로 정한 셈이었다. 나는 요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냥 일단 해보자.


그렇게 나는 TAFE 요리 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는 만만치 않았지만, 처음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사람들에게 '괜찮은 선택을 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결정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학기가 시작되자 금방 깨달았다.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은 진심으로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주권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라 그저 요리가 좋아서, 음식을 다루는 일이 행복해서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열정은 눈에 보인다. 배우는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 빛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나는 왜 요리를 좋아하지 않을까...'

그 질문은 꽤 오래 나를 괴롭혔다.


요리를 좋아해 보려고 애썼다. 레시피를 따라 만들기도 하고, 필독서라는 요리 서적을 여러 권 사서 읽었다. 유명 셰프들의 방송도 챙겨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요리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입맛이 사라졌고, 책은 처음 몇 장만 넘기다 책장에 꽂혔으며, 영상은 보다 말고 꺼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흥미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요리는 늘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 과정은 피곤하고 번거로운 노동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미 돈을 썼고, 시간을 썼고,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서른 살, 내 생애 처음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요리학교를 졸업했지만 실무 지식은 거의 없었다.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일머리가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체력적 한계까지 있었다. 그 모든 부족함을 감싸는 건 단 하나였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책임감 있게 해내는 태도.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비교가 끊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을까.'

'왜 열정이 생기지 않을까.'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고, 억지로 좋아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진짜 '열심히'는 될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다 보니 정작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들은 계속 뒤로 밀렸다.

그렇게 2년을 버텼다. 내 삶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놓자.'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는 없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열정에 대한 강박, 영어에 대한 압박,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고, 한국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근교로 여행을 다녔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자 삶은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는 나만의 기준을 세웠다. 요리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일로서는 책임을 지자.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메뉴가 바뀌면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메모했고 집에 돌아와 복습했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마음껏 몰두했다. 균형은 그렇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첫 직장에서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서툰 나를 챙겨주고, 일 끝내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결국 스폰서 비자도 받게 되었다.


요리를 여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이건 내가 생계를 위해 택한 길이고, 나는 그만큼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나는 유명 셰프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목표는 영주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에 맞게 살면 된다. 억지로 좋아하려는 대신 그저 지금의 삶을 내 방식대로 단단히 살아가면 된다.

지금의 나는 '좋아하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 일'과 '정말 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삶'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크게 성공하고 싶은 마음보다, 나는 그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