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1999)
《매트릭스》는 1999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온 작품으로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상 제대로 영화를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수업에서 《매트릭스》의 이미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강의를 통해 영화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장면에 담긴 암시적 의미들을 알고 나니,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많은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할 부분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실재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인 ‘토마스 앤더슨’은 낮에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활동한다. 네오는 세상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진실을 찾기 위해 매일 밤 컴퓨터 해킹을 시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네오는 ‘트리니티’로부터 네오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인 ‘매트릭스’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정부 요원들은 네오를 쫓게 되고, 트리니티는 네오를 탈출시켜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던 ‘모피어스’한테로 데려간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진실을 알게 되는 빨간 약과 계속 무지의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파란 약을 건네며 둘 중 선택하라고 한다. 그리고 네오는 망설임 없이 빨간 약을 선택한다. 결국 진짜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된 네오는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허구의 공간, 즉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1999년도라고 생각했던 현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2199년에 가까웠고, 태양으로부터의 에너지를 잃은 인공지능은 인간을 인공자궁에 넣어 자신의 자원으로 재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피어스는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기 위한 구원자가 바로 네오일 것이라고 말하며 매트릭스 세계의 예언자와도 같은 ‘오라클’에게 네오를 데려간다. 그러나 오라클은 네오에게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모피어스와 네오 둘 중 하나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렇게 모피어스와 네오 일행은 매트릭스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가려고 하던 도중 배신자인 ‘사이퍼’로 인해 요원들에게 위치가 발각된다. 그런데 네오가 구원자라고 믿는 모피어스는 그를 살리려고 하다가 미처 매트릭스를 탈출하지 못한다. 현실로 돌아온 네오는 모피어스가 요원에게 잡힌 것을 알고 다시 매트릭스 세계로 들어간다. 네오와 트리니티는 요원들로부터 모피어스를 빼내는데 가까스로 성공하지만 끈질긴 요원 ‘스미스’는 네오를 붙잡는다. 스미스의 총에 맞은 네오는 결국 죽게 되지만, 현실에서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오라클이 자신에게 했던 예언을 말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매트릭스 세계의 네오는 다시 눈을 뜬다. 네오는 다시 살아남으로써 매트릭스 세계의 물리법칙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고,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의 주제는 진실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는 감각정보를 끊임없이 의심하여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트릭스의 세계는 이전에 존재했던 세계를 모사한 허상일 뿐이라는 영화 속 세계관은 현실이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사상을 포함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영화 속 인물들은 감각을 거짓되고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처음 만났을 때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에서의 자각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제 1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꿈 속에서 당신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당신은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모피어스와 대원들은 맛을 고려하지는 않은 채 영양가 높은 단백질 합성 물질을 섭취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이는 감각은 무시한 채 본질만을 쫓으려 했던 근대의 사상들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포기하고 매트릭스에 안주하려고 한 사이퍼는 결국 동료들을 배신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영화 속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아무 망설임 없이 빨간 약을 택했던 네오처럼 무지가 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고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트릭스》의 이러한 영화적 표현들에 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감각정보를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정말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인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면 그렇게 얻어낸 진리가 정말 진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입증하기 어렵다. 모피어스의 말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매트릭스를 만들어 냈다는 것 또한 하나의 환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는, 매트릭스의 세계를 택한 사이퍼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사실, 영화의 전개를 위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배신자가 되어야만 했다. 물론 동료들을 배신하고 죽이기까지 한 사이퍼의 행동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쫓고 있는 진리에 대해 문득 회의감이 들었을 수도 있고, 막연한 진리를 쫓는 것 보다 무지하게 되더라도 당장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의 가치판단기준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진리를 쫓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사이퍼 또한 현실과 매트릭스 사이의 괴리감에 끼여버린 피해자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매트릭스》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인간의 잠재적 능력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는 것이라는 점, “깨어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음악을 영화의 엔딩곡으로 사용했다는 점 등은 칸트가 말했던 보편적 이성과 계몽주의, 인간 중심적 관점을 표현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자각으로 자신의 능력과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설정은 실존주의적인 관점 또한 적용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다중의 코드’ 또한 놓치지 않았다. 《매트릭스》는 작품의 설정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피어스를 비롯한 인류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적 존재의 출현을 기대하고 실제로 네오는 죽었다가 부활하여 인류의 구원자가 된다는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매트릭스》는 불교적인 상상력도 놓치지 않았다. 네오는 오라클을 만나기 전, 보는 것만으로 숟가락을 휘는 능력을 가진 한 아이를 만나는데 그 아이는 “숟가락을 휘려고 하지 말고, 없다고 생각하라”고 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한 ‘일체유심조’를 나타낸 것으로,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매트릭스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부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며 네오는 이러한 깨달음들을 통해 구원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 아이뿐 아니라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와 관련된 여러 아이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춰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감독은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의 다원성을 영화에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모피어스와 그의 대원들 사이에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었다는 점, 서양인인 네오와 모피어스가 동양의 무술을 익힌다는 점 등은 영화가 지배적 서사뿐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코드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반하는 사상을 내포하면서도 포스트모던적인 기법을 사용한 이중적인 작품 같다는 것이었다. 감독은 영화에 맥거핀과 같은 요소를 과감히 넣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 현실과 허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 경계를 허물려는 이야기 전개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플라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영화를 풀어가는 것 같지만,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을 영화 속 장면에 끼워 넣기도 하며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모사된 매트릭스에 대해서 암시한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가 어떤 철학적 관점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고 정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곧 하나의 영화 속에 다양한 철학적 사상이 공존한다는 것, 《매트릭스》가 어떤 하나의 맥락을 따르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감독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철학적 관점들을 모아 그 사상이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작품 속에 녹여 넣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장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잘 나타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영화의 결말을 통해 감독은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지만, 주어진 맥락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나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면,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가 없다’라고 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진리의 복수가능성을 인정해버려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쫓는 과정을 회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기에,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 더 험난하고 어려운, 어쩌면 영원히 깨닫지 못 할 과정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네오는 끝까지 진실을 쫓았을 때, 진짜 현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완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에서는 그것이 완벽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네오처럼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것에 다가가려 할 때(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구성되고 채택되는 것이라고 할 지라도), 우리는 스스로와 우리의 삶의 의미에 대해 더 깊게 파악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