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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뉴 Jan 10. 2019

라쿠나도 지울 수 없는 것

이터널 선샤인 (2004)


#1. 기억을 지우면 아픔도 사라질까?


  모두가 한 번쯤은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억을 지우면 아픔도 사라질까? 혹시 남은 사람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의 인생영화,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이겨가며 조금씩 망각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생략하고, 하룻밤 사이에 나를 아프게 하는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해질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인 ‘라쿠나’에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연인,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스토리는 아마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커플을 대표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누구나 연인과 트러블을 겪게 되며 관계에 권태를 느끼지만, 또 그 관계가 상실될 때의 고통을 두려워한다. 이 모든 상황과 감정은 분명 그 또는 그녀와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이 영화가 나온 지 정확히 10년 뒤인 2014년이었다. 제비뽑기에 적힌 영상 디자이너를 조사 해오라는 (당시 나에게 처음 주어진) 대학 과제에서 나는 이름부터 생소한 프랑스 출신의 영상 디자이너인 ‘미셸 공드리’를 뽑았다. 그 때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굳이 영화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첫 만남. 영화와의 만남도 이렇게 설레였지.


  이듬해 11월, 《이터널 선샤인》의 재개봉 소식을 접하고 나서 불현듯 이 영화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게 된 나의 첫 번째 《이터널 선샤인》은 신선함과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기존 로맨스 영화에 대한 나의 편견을 완전히 깨버렸다. 이 영화에는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상의 마술사로도 불리는 미셸 공드리의 화려한 연출력으로 탄생한 영상미와 미장센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가 생각한 사랑의 ‘본질’을 그린 각본은 나에게 로맨스 이상의 진한 여운과 울림을 가져다주었으므로 그는 나에게 ‘작가’ 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영화를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는데, 조엘의 ‘꿈’을 묘사한다는 특성상 연출에 기괴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사건의 순서가 뒤섞인 플롯 구성으로 내용이 난해한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리를 이해하고 나서, 영화를 두 번, 세 번 볼 때의 느낌은 처음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남자 친구와 처음 헤어지고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지워버리고 싶지만 추억하고 싶은 서로의 기억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2. 누구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따금 그 사랑에 실패하고, 상처 받고, 아파한다. 조엘도, 클레멘타인도, 매리도 그랬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처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지옥 같은 연애를 끝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과 사랑을 나눴던 때가 다시 떠올랐을 때, 그는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라고 말한다. 꽁꽁 언 찰스강에 누워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았던 기억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꽁꽁 언 찰스강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영화는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며, 자신의 고통과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랬을 때 우리가 문제에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조엘의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몬탁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보다 더 일찍 기억을 지웠던 매리는 자신의 감정까지는 지우지 못해 계속해서 하워드 박사의 주변을 맴돌았고, 또다시 유부남인 그를 좋아하게 되고 만다. 하워드 박사의 부인을 통해 자신이 같은 이유로 기억을 지웠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는 다시 한번 성숙한 사랑을 할 기회가 생겼고, 매리는 성숙한 이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이 SF적 요소가 다분히 많음에도 로맨스 드라마로 사랑받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주인공들이 벌이는 행동들이 너무도 애절하고, 또 멍청하지만 용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랑의 대표적인 요소들이며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맞닿아있다.


  따라서 이 영화 안에서 두 주인공과 관객이 갈망하는 로즈버드는 ‘몬탁(Montauk)’이 될 것이다. 내가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그와 처음 만났던 해변이 있는, 그녀와의 미래를 약속한 집이 있는 곳. 그곳이 ‘몬탁(Montauk)’이기 때문이다.




#3. 산산이 부서지는 기억


  기억이 강제로 지워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잊는다는 개념을 묘사할 때,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표현을 쓴다. 시각적으로 묘사한다면 점점 화면이 어두워지거나, 포커스가 나간 듯 흐릿한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하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많은 기억을 강제로 ‘삭제’했다. 영화 속에서 기억을 지우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래서 미셸 공드리는 이 과정을 세상이 ‘무너지고 조각나고 없어지는’ 파괴의 방식으로 묘사했다. 조엘의 꿈속,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주변 사람들, 꺼지는 전등, 무너지는 지붕과 벽 등은 조엘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매우 탁월한 미장센이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 연출이 이렇게 독특하고 개성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예술적 감성과 더불어 감독 데뷔 이전에 많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광고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영상제작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사 안에 이미지를 담고, 이미지 안에 또 서사를 담는다.

  기억을 지운 두 사람이 몬탁에서 돌아와 첫 번째로 들르는 곳이 바로 찰스강이다. 꽁꽁 언 찰스 강 위에 누워 있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장면에선, 언뜻 보면 조엘이 우려했듯 빙판 위에 금이 가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금의 중심에서 비껴가 있는 둘의 위치를 보면, 금가 있는 관계 위에서도 용기 있게 성숙한 사랑을 할 것이라는 보여주고, 둘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그의 세심한 연출이 드러나는 부분을 또 꼽아보자면,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색감을 항상 생각한다는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변덕스러운 성격의 클레멘타인은 머리색을 바꾸는 것이 취미라고 할 정도인데, 그녀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부르는 염색약 이름들은 조금 특이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서로에게 신선함을 느낄 때, 그녀의 머리색은 초록색(Green Revolution)이다. 그리고 조엘이 그녀에게 고백할 때의 머리색은 연애 초기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표현한 빨간색(Red Menace)이고 이는 그들의 사이가 ‘좋기만 한’ 시기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색이 점점 오렌지 빛(Orange Agenta)으로 색이 빠질 때쯤, 그들의 사이는 점점 깊어지지만 그만큼 편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잊는 모습을 보이고, 그 오렌지 빛마저 다 없어질 때 그들의 관계는 산산조각 난다. 클레멘타인이 라쿠나에서 조엘의 기억을 지운 후에는 자신을 잃는 듯한 공허함과 우울감을 느끼는데, 그때 그녀의 머리색은 우울을 상징하는 파란색(Blue Ruin)이다.

  이 밖에도, 여러 사건을 오갈 때 독특한 장면 전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영화의 묘한 분위기와 CG효과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아이와 성인의 모습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의 애틋함을 보여주기에 과연 훌륭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터널 선샤인》과 비슷한 콘셉트와 소재로 주목받는 영화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있다. 기계로 조작하는 기억 또는 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꿈속에서 배경의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 기억 또는 꿈을 통한 왜곡, 그리고 현실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크게 보았을 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서사도 비슷하다.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마주할 수 있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인셉션》이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던 부분은 이미지를 서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한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서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로써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글이 아닌 영화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인셉션》과 비교했을 때 《이터널 선샤인》은 히치콕이 말했던 ‘보는 영화’와 잉마르 베르만이 추구했던 대중 일반이 공감할 수 있는 ‘말하는 영화’ 사이의 균형이 매우 조화로운 영화라고 느껴졌다.




#4. 우리는 우리를 음미해야 한다


“그냥 음미하자(Enjoy it).”


‘서로를 처음 만난 이 순간마저 지워질 텐데 어떻게 할 거냐’는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물음에 조엘이 하는 대답이다.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기억만은 음미하자는 조엘의 말은 나에게 그녀를 잠시나마 추억하고 싶은 그의 간절한 외침으로 들렸다. 결국 그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모두 소중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아마 클레멘타인 또한 그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쁜 줄만 알았던 그와의 기억 속에 좋았던 기억 또한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조엘 그 자체를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운 후 만난 패트릭이 조엘을 따라 하면 할수록 더 큰 혼란과 공허함만을 느꼈다. 그녀에게 조엘의 자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조엘의 기억은 지웠어도 그에 대한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매리가 하워드 박사에게 또 자석처럼 이끌렸던 것처럼 말이다. 조엘 또한 밸런타인데이에 몬탁의 바다에서 처음 본 여자라고 생각했던 클레멘타인을 보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졌고, 결국 그녀를 다시 잡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흔히 나를 괴롭게 하는 기억만 없으면 더 이상 내가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터널 선샤인》의 서사를 통해 그 생각을 의심해본다. 정말 그럴까? 기억은 생각보다 더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라쿠나의 기술 없이도 실제로 우리는 꽤 많은 기억들을 잊으며 살아가고, 상황에 따라 기억은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과 느낌은 잔상처럼 마음에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라쿠나도 지울 수 없는 것―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감정(마음)’일 것이다. 그 감정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에 대한 나의 감정과 그것을 만든 기억 모두가 ‘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나’ 그 자체이고, 《이터널 선샤인》에서 묘사된 것처럼 곧 ‘나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진짜 나를 위한다면, ‘나의 세상’이 아름다워지기를 원한다면, 그 세상을 추하다고 파괴하지 말자. 고통스럽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음미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들이 바로 나를, 서로를, 우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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