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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뉴 Jan 14. 2019

존재의 의미로부터 연대와 기록까지

하이데거 사상에서 읽는 연대와 기록의 의미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그동안의 철학사에서 정의해 온 ‘인간’에 대한 개념을 뒤엎고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안에 던져져서,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고,
다른 존재자들의 의미가 만개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그로 인해 스스로 변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



  그의 문제의식은 바로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인간이 존재자로서의 본연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이며, 기존 실존주의 철학에서 다뤄왔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차원의 문제제기가 아닌 ‘존재’와 ‘존재자’는 다른 것이라는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이해되는 존재의 의미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시각과 이해는 계속해서 달라져왔다. 예를 들어, 고대 플라톤에게 있어서 존재자들의 현상 세계는 이데아의 ‘짝퉁’에 불과했으며, 중세의 존재자들은 신의 피조물이었고, 인간의 이성(합리성)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 근대의 존재자들은 유용성을 고려할 대상이 되어 모두 도구적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플라톤부터 니체까지의 철학사를 살펴볼 때, 존재론이 없는 철학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다. 하이데거 이전까지 ‘존재’란 단순히 우리 눈앞에 존재하며, 막연히 지속될 것이며 자명한 것으로써 여겨졌는데, 이와 같은 ‘대강’의 인식은 최고의 존재자를 존재의 개념으로 치환하는 오류로 이어졌다. 이는 곧 존재의 의미에 대한 왜곡이었고, 오해로 점철된 존재자에 대한 이해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망각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 제대로 물을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 존재란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데, 앞서 말했듯 존재의 의미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는 존재자의 총합도 될 수 없으며, 최고의 존재자가 곧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이렇듯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존재’란 ‘존재자’의 층위의 것들을 규정하기 위한 설명과 분석방식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존재자인 우리가 존재의 층위에 제대로 닿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물음’이라는 행위에 집중했다. 모든 물음에는 물음의 주체가 있고, 물음의 대상이 있으며, 물음이 걸리는 방식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서는 물을 수 없고, 완전히 안다면 물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물음에 걸리는 자는 물음의 대상과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즉, 존재에 대하여 묻는 유일한 존재자로서의 ‘인간’과 ‘존재’는 관계하며, 그러한 인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우회적으로 ‘존재’의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 인간은 시간 안에서 유한성을 가지며 이는 인간 각기의 ‘존재’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존재에 대하여 묻게 되는 것 또한 시간성에 걸릴 때, 즉 필멸하는 유한자인 ‘나’의 존재를 통렬히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극단적 가능성을 이미 배태하고 피투된, 그러한 세계 속 자신의 존재를 떠맡게 된 존재자인 인간은 우선, 대부분의 경우 죽음을 도피하며 살아간다. 그 편이 훨씬 자신에 있어서 유혹적, 위안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존재자의 비존재는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을 낳고 이는 존재의 의미를 묻게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내 사라져 버린다. 불안은 공포와는 달리 위협적인 것이 어디에도 없는 상태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존재는 일상성 아래 세인으로 존재하며, 본래적 개시 성을 발휘하기보다 퇴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의 정태성이 개인적 차원에서만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를 통해 집단적으로 공유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지난 시기에 일어났던 참사의 그늘을 기억한다. 우리가 보고 겪은 4·16 참사는 ‘탈출하라’가 아닌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과 눈앞에 서서히 가라앉는 배를 두고도 구출하지 못하고 꽃다운 생명들을 물속에 가두었던 일이다. 2016년 겨울의 생각해보자. ‘나’를 비롯한 ‘존재자’들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차단된 상태의 ‘헬조선’의 중심에 우리는 모였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명목 아래 행복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이 아닌, 무차별적인 경쟁의 소용돌이의 세계 속으로 내몰려 있었던 ‘나’의 존재를 자각했다. 그 날의 촛불은 사회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약자를 더욱 도태시키고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분노였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가능성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즉 개인이 피투된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세인으로서의 개인은 부모의 재산이나 자신의 학벌 등 사회가 구성한 잣대를 기준으로 자신의 희망이나 꿈을 스스로 검열하고 가능성을 축소시켜왔다. 촛불로 모였던 기억은 너무나 비일상적인 현실이기에 그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세인으로서, 각자의 계급과 이익으로 돌아가 각자의 일상에 잠식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한 세계는 어디서도 볼 수 없지만, 어디에나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포스트 신자유주의, 자유에 대한 자유를 어디서 상상할 수 있고,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먼저, 그 저항의 시작은 ‘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세먼지 가득했던 날의 저녁, 따가운 눈을 닦아내는 손의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일생의 단면을 읽을 수 있기에, 지금 세태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고, 어떤 기분인지 적어 내려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나 매우 강력한 저항의 뿌리가 될 수 있다. 기록하지 않은 기억은 왜곡되거나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기에 어렵다. 기록하는 일은 그 과정을 통해 나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금과 다른 현실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기록은 ‘현존재인 나, 공동 존재자가 될 타자, 그리고 존재자들이 던져진 이 세계와 내가 새로이 지평을 열어가는 세계’에 대한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기에 우리는 기록해야 하며, 기록을 통해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즉, 기록이 사회연대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기록의 형태는 아주 작은 종잇장에서부터 영상, 사진, 문자, 구술 등 다양할지라도 모든 기록은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구의역 사고를 비롯해서 맥없이 당한 수많은 사건과 사고는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정보의 은폐와 폐기 앞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는 간단한 한 건의 교통사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사고 원인과 대응, 그리고 결과와 후속조치를 담아야 할 매뉴얼조차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기록은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한다. 단순히 정보의 기록에서 더 나아가 어떤 기록을, 어떤 시각으로, 어떤 의미로 기록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며, 바로 그것이 기록의 본래적 의미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사 당시 국가와 사회의 무능력함을 지켜본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뜻있는 시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지 않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의 진상규명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함께 하고자 했다.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와 가족들의 기록과 더불어 분향소에서의 추모, 거리거리의 추모의 메시지와 추모 리본 또한 참사의 기록이 되었다. 추모 기록은 시민의 마음을 담은 기록이자 훗날 ‘기억할게’라는 시민 개개인의 다짐의 증거가 되어 참사를 기억하고 참사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실천적이고 윤리성을 요구하는 사회철학적인 논의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풀어냈다. ‘존재’야말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가장 근본적이고 막강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단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란 ‘우리가 던져졌지만, 여러 존재자들과 부단히 교섭해가며 새로이 만들어 가는 곳’이라고 했다. 현존재인 우리는 ‘마음씀’을 통해 환경적 존재자들을 세계로 만들어가고 ‘나’역시 그 세계에 의해 만들어가며 죽음에의 선구적 결의성을 가지고 각자 기투하며 장래를 만들어간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모순으로 점철된 우리가 속한 이 세계에서 피투된 현존재들이 다른 공동 존재자들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건립하기 위해 도모하는 기투성. 즉, 환경 세계를 바꾸려는 시도로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연대’는 하이데거가 추구했던 현존재들의 존재방식 중 하나로, 세계를 향한 살아있는 저항 방식이 될 것이며, 기록은 연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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