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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군 Jan 11. 2020

가족 안에서 희생자로 산다는 것

나는 누구한테 의지해야 하는 건가요

“곧 있으면 합격 발표 나온대!”

지난달 응시한 2017년 물리치료사 국가고시 결과를 앞두고 강의실에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최악의 상황에 대한 걱정을 못 참겠다는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데 난 왜 아무렇지가 않지?

정말이지 아무렇지가 않다. 아니 내심 떨어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아.. 설마 떨어지진 않겠지?”
옆에 있던 친구가 긴장한 기색을 내비쳤다.

“몰라 떨어지면 떨어지라지. 나랑 인연이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할래. 떨어진 거 핑계 삼아서 다른 일을 시작하고 그게 내 길일 수도 있잖아?”
내가 대답했다. 진심이자 내가 나에게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떨어졌을 때 한 마디씩 할 것 같은 얼굴들이 떠올라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2017년 제44회 물리치료사 시험에 응시한 효군은 합격하였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는구나. 핑계 삼긴 글렀네 글렀어. 왜 나에겐 주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핑계와 구실이 필요했던 걸까. 내 마음이 원하는 건 나중으로 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2019년 12월 중순. 미뤄뒀던 내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세 달 전 처음으로 프로베라 정(호르몬제)을 처방받으러 왔고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다. 어째 피로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쉬는 거에 비해 컨디션이 나아지질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월경을 안 한 지가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처방받은 약을 먹고 나서 기능을 회복했지만 그러고 나서도 3개월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도중에 와야지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방 안에서 넘어져 발가락에 골절을 입는 바람에 보호자 역할이 우선이었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네.. 엄청 많이요. 아빠가 입원해 계셔서 보호자로 간병을 해야 하거든요.”
“엄마는? 형제 없어요?”
“엄마도 병원에 계세요. 형제 없어요. 외동이에요.”

말하는데 눈물이 나려 했다. 병원에 오면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위로를 받아서일까.

“초음파 찍어보니까 자궁은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선 스트레스로 호르몬 때문이라고 봐요. 다만 3개월마다 약 처방받아서라도 해야 돼요. 안 그러고 두면 그게 조기폐경되는 거예요.”

진료실을 나와서 계산을 기다리는데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눈물이 나다가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쏙 들어가 버리는 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끅끅 거리며 울고 있었고 계산을 마치자마자 비상계단으로 가서 오열하다시피 쏟아냈다.

받은 메시지함에는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면 병원에서 퇴원 처리시킬 거라며 빨리 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 문자가 와있었다. 인생 살기 참 거지 같네.

그렇다고 이런 짐을 나눠 들어달라고 청할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도 입원했을 때 아직 남은 대학과정과 면접 준비 중인 나를 도와주셨던 큰엄마. 교대하며 보호자를 해주신 큰엄마께 다시 부탁드리기엔 죄송스러웠다.

아빠의 형제인 친척은 본인의 걱정스럽고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토로할 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분의 동생을 향한 불편한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가 옆에서 보호자로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지시할 뿐 주말엔 여가생활 즐기느라 바쁘고 평일엔 일하느라 바빠서 아빠에게 와보거나 같이 병원에 가줄 용의 따위는 없다고 해석될 뿐이었다.

가족과 친척들은 늘 희생하고 짊어지는 일원에게 본인의 짐까지 티 안 나게 맡길 뿐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일지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가족을 이렇게나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낄 만한 말을 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실질적으로 한 역할은 없으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며 마치 본인의 역할을 수행한 것만 같은 정의로움을 느끼고선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열심히 살겠다는 사람을 수차례 찾아와 넘어뜨린다. 나의 한계치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거운 짐을 그냥 놓아버리면 좋을 텐데 바보같이 다시 지고서 일어나는 나다. 이럴 땐 머리보다 몸이 똑똑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과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제발 좀 알아달라고 몸이 나선다. 병원에 가서야 정신을 차린다. 나 많이 힘들구나. 그제야 나를 알아준다.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려봤다. 내가 여태 열심히 산 것은 우습게도 가족을 위해서였다. 나부터 건강해야 가족을 돌볼 수 있다는 다짐은 늘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전제와 함께했다. 나는 이제 내가 건강해지는데 그 어떤 이유와 목적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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