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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대웅 작가님의 2차 세미나 후기

나를 돌아보게 했던 시간

by 정윤

사십 대 초반, 늦은 나이에 소설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나이는 항상 나를 위축시켰고 주눅 들게 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먼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았다. 멋모르고 뛰어든 바닷속은 너무 막막했고 두려웠다. 뒤늦은 후회와 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숨을 헐떡이며 도망치듯 바닷가로 기어 나왔다. 내 지친 숨소리는 휘몰아치는 파도 소리에 묻혔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소설 쓰기를 그만둘까. 좌절과 갈등 속에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듯 시간이 흘렀다.


소설을 쓴 지 만 6년 만에 신춘문예 당선이 되었지만 절필해야 했다.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오랜 갈등 끝에 과감히 글 쓰는 것을 포기했다. 행여나 글이 쓰고 싶어질까 봐 의도적으로 일기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철저히 글 쓰는 세계를 외면한 채 십여 년을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내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가슴속은 텅 빈 채로 허허로웠다. 마음은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한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작년 말쯤,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글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절필하는 동안 내 몸의 감각과 리듬감이 많이 굳어 있었겠지만, 글을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다른 작가들은 구독자 수도 많고 라이킷과 댓글도 많았지만 내 글엔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자체를 즐기자 마음먹었다. 쓰다 보니 내 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떤 뚜렷한 주제도 없이 내키는 대로 에세이를 썼다가 소설을 써서 올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배대웅 작가님의 글을 보게 되었고, 그의 글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의 글은 뚜렷한 주제의 틀에 맞추어 확고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군더더기도 없고 독자를 끌고 가는 흡인력 또한 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물론 비문학적인 글이었지만 그의 글은 논리 정연했고 진중했다. 구독을 눌렀고 그의 글에 시간 나는 대로 댓글도 달았다. 1차 세미나를 놓쳤고 기대했던 2차 세미나에 설레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번 세미나는 글쓰기의 기초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좋은 글의 조건은 누구나 명확하게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윌리엄 진서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나를 위해 쓴다’라고 답한다. 이 또한 글쓰기의 진리다. 나 역시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 십여 년을 글을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 속에 살았다. 글을 다시 쓰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찾은 느낌이었다. 독자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글을 쓰니 살 것 같았고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글쓰기는 고독한 순간들을 견디며 나를 찾아가는 행로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첫 번째 세미나에서 주어졌던 화두를 공감하며 들었다.

두 번째로 깊게 다가온 것은 구조의 힘이었다. 발제에서는 두괄식의 중요성과 문단 간 자연스러운 흐름, 즉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토론에서는 특히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활발히 오갔다. 하나의 글 안에 여러 개의 메시지를 넣으려는 욕심이 글의 방향성을 흔들 수 있다는 지적에 깊은 공감이 되었다. 특히 ‘통일성은 문장보다 사고의 문제’라는 말은 글쓰기의 본질이 결국 생각을 정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글을 시작할 때 첫 문장, 첫 단락에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개념들이었지만, 도입부에 독자를 유혹해서 붙잡아야 한다는 명제는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발제자인 배대웅 작가님의 설명과 다른 작가님들의 경험이 더해지자 더 깊은 밀도로 다가왔다. 이번 시간이 내 글쓰기 습관을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론 중 한 작가님이 ‘글이란 결국 독자의 사고를 안내하는 장치다’라고 말했는데, 그 문장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글쓰기를 기술로 바라보라는 발제의 메시지가 세미나에 참여하신 여러 작가님들의 경험치로 해석돼 공유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글쓰기의 과정이 ‘추상화–구조화–상세화’로 이루어진다는 발제자 배대웅 작가님의 설명은 매우 실천적인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프리라이팅(구상), 아우트라인(구조), 초고 집필, 수정, 편집의 글의 개요(아우트라인)를 확정하고 실제 문단 단위의 전개를 작성해 나간다. 각 문단에 어떤 논점을 담을지, 문단들의 순서와 연결 관계는 어떠해야 할지, 세부적으로 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 미리 플롯을 철저하게 짜놓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못 된다. 그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즉흥적으로 낙서처럼 글을 쓰다가 그걸 토대로 살을 붙여나가는 식으로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썼다. 그러다 보니 중심을 놓친 적이 많았고, 퇴고를 수없이 하며 힘든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동안 나는 구조 설계를 소홀히 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토론에서 ‘초고를 잘 쓰는 것보다 퇴고가 글의 진짜 시작’이라는 의견이 나왔을 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발제문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퇴고 원칙도 토론의 좋은 촉매가 되었다.

이번 세미나는 단순한 ‘강의 듣기’가 아니라, 각자의 글쓰기 태도를 돌아보게 한 시간이었다. 배대웅 작가님의 깊이 있는 설명과 참여 작가님들의 솔직한 의견이 더해지자, 글쓰기라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선택과 사유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다시 실감하게 됐다. 다음 글을 쓸 때는 먼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한 문장으로 적어보고, 그 문장을 중심으로 구조를 세운 뒤 문장을 다듬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싶다. 문장보다 생각을, 감정보다 구조를, 욕심보다 명확성을 떠올리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내용도 충실하고 알찼지만, 글벗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든든한 힘을 주었다. 외로운 글쓰기의 여정을 함께 공감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글벗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이번 세미나 준비를 위해 글을 써주시고 어려운 시간 만들어 주신 배대웅 작가님께 감사드리며 같이 했던 작가님들께도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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