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연대기 2

벗어나기

by 미스터 리


<누가 승자인가>


‘내가 가진 것이란, 내가 갖지 못한 것의 나머지일 뿐’이란 신문 기사 제목이 문득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 조선시대 한양에 살던 조수삼(1762∼1849)은 자신에게 만 권의 책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디 있냐는 객의 질문에 자신의 뱃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굶주림 면하는 데 족하다지만, 어찌 자루에 곡식 가득한 처지와 같으랴”라고 읊조린다. 기사에서는 시인을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매달려 삶을 바꾸고자 했지만 중인이란 신분적 한계를 벗어날 순 없었다’고 설명하며, ‘애당초 부귀를 타고난 이들과 어찌 같겠냐고 얼버무린 회한의 말이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고 마무리했다.

조수삼의 시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결핍’이다. 만 권의 책을 탐독해도 가지지 못한 것에서 오는 구차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린 어떨까. 결핍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장면은 그들이 결핍의 세계로 내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류로 확대하든, 개인으로 한정하든, 사람의 연대기는 늘 결핍과의 전쟁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전쟁에 당당히 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 구차해진다.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결핍을 모두 채울 순 있을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결핍은 결코 다 채울 수 없기에, 우리에게는 승산이 없다. 패배를 언제 인정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누가 예외인가>


결핍과의 전쟁은 결국 ‘가진 것’을 이용해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는 싸움이다. 영화 ‘대부’는 그 전쟁의 처절함과 함께 허망함 또한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돈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독백이 그 허망함을 대변한다.



돈 꼴리오네의 얘기.jpg 영화 '대부'의 한 장면

난 평생 상류층으로 올라가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모든 게 합법적이고 깨끗한 곳으로 말이야.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내 손이 더 더러워지는구나.

대체 언제 끝나려는지...

여기선 수백 년 동안 서로 죽이는 살육전이 계속되어 왔다.

돈, 명예, 가족... 명목은 그런 것들이었지.

돈 많은 고위층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러기도 했어.




대다수의 우리는 마이클 코를레오네처럼 수많은 살상에 관여한 인물이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도 각자의 연대기 속에서 갖은 애를 쓰며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올라가려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큰 욕심 없이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생존 자체가 결핍과의 전쟁이다. 의식주에 상관없이 육신을 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가장 기본적인 생존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라 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현재의 무언가를 미래의 무언가와 끊임없이 바꿔야 하는 이 ‘대체’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할 수 없다. 전쟁이다.



<누가 죄인인가>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끝만 깨끗하다면, 과정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말했다. 자신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로서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추방시키는 일을 총 감독했다. 자신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지만 그가 강제 수용소로 보낸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이히만.png 예루살렘에서 재판받는 아돌프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는 그의 재판과정을 기록하며 말하길 악이 이토록이나 평범하다고 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의 1급 전범에게서 평범성을 들여다봄으로 인해 소름 끼치는 시사점을 남겼다. 그리고 그 주장은 많은 논란과 반박을 불러왔기 때문에 더 거대한 차원의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아이히만을 기소한 검사와 그를 재판한 재판부는 그가 나치 친위대 시절 자신의 행동이 범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사형선고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 아렌트가 정상인인척하는 범죄자의 기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물론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기만을 과소평가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인의 기만이 아니다. 기만은 최후의 발악일 뿐이며 죄를 선택한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중요하게 들여다볼 것은 선택의 순간, 범죄임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선택하게 만드는 ‘죄성(罪性)’이다. 그리고 죄를 반복해서 지을 때마다 비판의식이 점점 사라지며 더욱 견고한 죄성을 갖춰가는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사상에 빠질 수 있고, 홀린 듯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뉘우치기보다 자기변명으로 일관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란 결국 '비판 없는 전쟁'을 뜻한다. 악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조금 더 두드러져 보일 뿐 평범한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전쟁을 통해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 없는 전쟁은 돛을 거둔 배처럼 방향 없이 흘러가다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부딪힌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여지없이 고통이 피어오른다. 누군가의 고통과 맞바꿔진 달콤함을 입속에 넣어주는 이 초콜릿 왕국에서 우리는 과연 죄를 분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중요한 소식>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의 전쟁이 생존이나 발전을 위한 보이는 전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惡)’과 타협하려는 마음과의 전쟁, 더 나아가 악 그 자체와의 전쟁, 즉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보이는 전쟁만 치렀다면 인류는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가 아직 존속하며, 인류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보이지 않는 전쟁, ‘악’과의 전쟁 또한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악’과의 전쟁에 임하는 가장 첫 단계는 우리 안의 ‘죄성’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성경은 죄가 우리를 원하며, 악마가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다스리라고 말하며, 깨어있으라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지만 승리의 길이 있다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악의 연대기 세계관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전한다. 또한 이 절망과 희망 모두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악의 연대기, 즉 악의 굴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소식일 수밖에 없다.



<‘보는 자’에서 벗어나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예수가 죄에 대해 가르친 것 중에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다른 이의 죄를 보기 전에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라는 것이었다.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보며 ‘본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이의 죄만 보려고 하는 그들의 습성을 꼬집은 것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죄란 범인과 자신들을 구별해 주며 오직 그들만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은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의인으로 포장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들의 판별 기준에서는 예수도 죄인이었다. 그들은 진짜 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보는 자’로 살기 원했다. 스스로를 ‘보는 자’로 여긴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죄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들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말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전쟁은 죄인을 양산한다. 우리는 결핍과의 전쟁, 이 악의 연대기에서 모두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성인이나 철학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남녀노소 모두가 마음으로는 할 수 있으면 이 전쟁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음속 다른 한편에서는 늘 죄의 법이 일어나 우리를 끌어내려 구속한다. 예수는 그 죄의 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살아나 영원한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가 삶의 목적을 바꿀 때 유일한 돌파구가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는 절망과 희망, 끝과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상징하며, 무덤과 부활을 동시에 전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마지막 말, ‘다 이루었다’는 말이 새겨진 십자가를 떠올려야 한다. 그가 ‘다 이루었다’고 한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길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의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그의 십자가를 떠올릴수록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해야 할 것들이 재정립된다. 그리하여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만든다. 구원은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 십자가를 향하여 설 때 우리는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메시지 아래 있다. 성경은 그 메시지를 절망의 돌파구로 삼는 사람에게 자유가 따를 것이라 했다. 결핍과 구차함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전쟁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보낸 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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