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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Jan 08. 2019

흑백으로 사는 세상

감정의 억압은 심리적 고아로 사는 것 / 흑백 꿈 2


예전 부모교육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강의에 참여했던 B에게는 터울이 많이 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B는 일찍 결혼해서 큰 아이를 낳았고, 부부는 첫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으로 엄하게 키웠습니다. 남자답게 키운다며 아이의 감정에 제재를 가했습니다. 특히 아이가 울 때면 남편은 ‘계집애처럼 운다’며 화를 냈고, 손찌검할 때도 있었습니다. 다 아이를 위한 훈육의 과정이라 여겼습니다. 아이는 ‘남자답고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큰 아이를 키우고, 8년이 지나 작은아들을 낳았습니다. 미숙했던 젊은 엄마로서 큰 아이를 키우며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아이에 대한 애정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큰 아이와는 달리 둘째에게는 관대하고 너그러웠습니다. 그런데 큰애가 동생을 자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부모가 동생을 예뻐하니 샘내는 거라 여겨 큰애도 똑같이 예뻐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생에 대한 태도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큰 애를 관찰하니 동생이 울 때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달려가서 주먹을 휘두른다는 겁니다. 나중에 큰애와 조용히 얘기를 해보니, 아이는 동생이 울면 자기는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큰 아이의 감정은 억압되었던 것이죠. 그것을 부모는 씩씩하다고 보았습니다. 감정을 눌러버리면 좀체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세밀한 감정들도 느끼기 어려워집니다. 문제는 자신이 때리고 괴롭혀서 동생이 아프고 힘들다는 것을 공감하기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큰 아이는 자신이 울 때 아빠에게 수치심이 들 정도로 야단을 맞았습니다. 아이는 ‘우는 것은 나쁜 것’으로 인식되었고, 우는 동생에게 화내는 것은 정당하다 여겼던 것입니다.          

예전, 친정어머니에게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있었습니다. 위의 큰 아이처럼 어머니는 아이들이 우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습니다. 아니 ‘두려워했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어릴 때 우리가 울면, 달래주기보다는 화부터 내셨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우는 입을 막을 듯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어머니의 엄청난 슬픔이 건드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마치 너무 곪아서 성난 상처를 조금이라도 건드릴까 봐 겁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열 살에 어머니를, 열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의지했던 오빠는(외삼촌)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마흔하나에 남편(친정아버지)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픈 상처가 건드려질까 봐 슬픔은 물론 다른 감정들까지 억압하였던 것입니다. 덩달아 우리의 감정들도 나올 수 없었고 공감받거나 수용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종일 벽지와 천정의 형광등을 보다가 무언가에 압도당하듯 가위눌린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쓴 습작입니다.       


   

한 가지 무늬의 벽지       

   

작은 아이, 이부자리에 누워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벽을 보니

한 가지 무늬의 벽지

우중충한 빛바랜 푸른 기하학적 꽃무늬가 

늘 활짝 피어있습니다.

향기도 아름다움도 빛깔도 모두 빼앗긴 채.

벌러덩 벌어진 꽃잎들은 한 번도 오므려 본 적 없습니다.   

  

눈은 무늬를 따라 천장에 이릅니다.

해쓱한 형광등이 천장 한가운데 위태롭게 매달려 있고

눈은 점차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거대한 힘이 눈을 휘감아 채어 끌고 갑니다.

놓여나고 싶지만 홀린 듯 놓아주지 않습니다.

무늬는 점점 커지고

아이 몸은 점점 작아집니다.

결박된 채 누워있는 작은 몸 위로

거대해진 무늬의 프레스가 서서히 내려옵니다.

온몸을 억누르는 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늘도 죽어가고

할 일을 마친 벽지는 제자리로 돌아가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마음의 아픔을 표현해주는 것이라 봅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다양한 색채와 무늬를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억압당하면 마음이 병들고 몸으로도 병이 나타납니다. 아이 안에 살아있는 생생한 감정들을 억압하는 것은, 아이의 몸을 거대한 프레스로 눌러 압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의 억압은 심리적 고아로 사는 것입니다.      


에릭 에크로이드가 쓴 <꿈 상징 사전>에서 억압과 억제의 차이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억제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억제와 억압으로 인하여 초자아는 팽창되고, 원본 능은 더욱 고통스러워지고, 족쇄에 채워지게 되며, 좌절을 겪게 된다.’     



연구에 의하면, 흑백 꿈은 여자들보다도 남자들이 훨씬 많이 꾼다고 합니다. 이는 많은 문화권에서 아이들을 키울 때, 알게 모르게 여아와 남아를 감정, 정서에 있어서 다르게 키우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여자아이의 감정표현들을 받아주지만, 남자아이에게는 ‘나약하게 키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감정적인’ 아이가 될까 봐 잘 받아주지 않는 것이죠. 특히 남자아이가 ‘우는 것’, 눈물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불편해합니다. 

이와 반대 현상도 있습니다. 남자아이가 화를 내는 것은 지지를 받는 편이지만, 여자아이가 화를 내면 ‘여자애가 성깔 사납다, 그러면 시집 못 간다, 여자는 상냥해야 한다….’라며 제재를 가합니다. 그러니 여자들은 ‘화내는 것’에 대해 불편해집니다. 결국, 여자나 남자나 모두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감정이 억제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남자가 울고 싶을 때, 혹은 여자가 화를 내려고 할 때, 자신 안에 어떤 강한 내적 장치가 비상경보기 울리듯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자는 울기 어려운 감정을 화로 바꾸고, 여자는 화내기 어려운 감정을 눈물로 바꾸는 상황이 됩니다. 저 또한 남편에게 화를 내려고 하면 순간적 두려움이 엄습해 눈물로 터져 나오곤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잠깐씩 일어나는 화는 인지할 수 있었지만, 쌓여 있는 분노를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한 지인의 남편은 자신의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젓하게? 장례를 치렀답니다. 그러다 쉰이 넘은 어느 날 아침, 침대에 일어난 남편이 부모님이 꿈에 나왔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진 것입니다. 그 울음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오듯 오열하며 쏟아졌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어머니가 그때 암으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이 나서 울었답니다. 아버지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후회의 감정들이 계속 올라와서 또 울었답니다. 감자 캐듯 연이어 일어나는 또 다른 슬픈 기억들로 남편의 울음은 멈춰지지 않았답니다.

현재 지인의 남편은 TV 드라마만 봐도 눈물 철철 나는 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감정에 갇혀 있던 남편이 이제는 풀려났다고 해야 할까요? 눈물만 나는 것이 아니랍니다. 예전의 경직되고 융통성 없는 남편이 아니라 장난기 가득 농담도 하고, 잘 웃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예전 연애할 때 남편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감정은 본질의 자신을 찾아가는 열쇠가 됩니다. 아드리안네의 실타래처럼 알 수 없는 복잡한 미궁 같은 삶 속에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억압은 인생의 미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은 흑백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자기감정에 집중하는 것도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자기감정을 통해 자신을 알아야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지각과 생각, 행동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매 순간 자기감정을 아는 것이야말로 본래 모습과 교감하고 자신의 중심에 뿌리내릴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여성이 자기를 상실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자기감정과의 단절이다. 자기감정을 모르면 자신에게 이롭게 행동할 수 없다.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고, 상대에게 결정권을 넘겨버리기 쉽다 “     

                                           -비벌리 엔젤,  <자존감 없는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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