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상을 닮은 기술, 기술을 닮은 세상
저장 장치를 개발하다 보면 '불량 분석'이 일상이 된다. 불량 분석이란 제품 평가 결과가 기대와 다를 경우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해당 평가를 통과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다. 예를 들어 쌍쌍바 포장을 뜯었는데 손잡이가 하나밖에 없어 사실상 '쌍' 기능을 상실한 경우 존재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심각한 불량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한 쪽 막대기를 반으로 잘라 다른 쪽에 꽂는 기지를 발휘할 순 있겠으나 이는 근본 원인을 해결했다 볼 수 없다. 쌍쌍바를 하나 더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쌍욕만 먹을 뿐이다. 이 불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태 제과 주식 매수 후 주주총회에 참석하여 40년 넘게 사랑을 받아온 쌍쌍바 생산라인에 6 시그마 경영을 도입을 주장해야 한다.
자기 글 오탈 자는 잘 안 보이듯 자기가 개발한 기능이 내포한 위험 역시 잘 보이지 않는다. 불량 분석은 개발자가 미처 고려하지 못 한 부분을 찾아내 제품 안정성 및 신뢰성을 높여 준다. 또한, 특정 변경점이 의도치 않게 다른 부분에 영향을 주는 부작용을 걸러주기도 한다. 일반적인 개발자들이 개발과 불량분석에 할애하는 비율은 어떻게 될까? 편차는 있겠지만 보통 불량분석에 투자하는 시간이 2배 이상 길다. 개발이 완성된 그림을 보며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라면 불량 분석은 완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억지로 짜 맞춰진 부분을 찾아 제대로 고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불량 분석에는 추론과 상상이 필수다. 이런 이유로 우리 회사에선 불량분석에 능한 사람을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양한 개발자 만큼이나 다채로운 불량 유형이 있다. 겉으론 쉬워 보이지만 뚜껑을 열고 보면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까다로운 불량, 반대로 평가 리포트만 봐선 상당한 내공 아니면 덤비면 안 될 바이브가 느껴지나 실은 단순 실수에서 비롯된 불량도 허다하다. 불량도 겉보기로만 판단해선 안된다. 확신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칼퇴를 생각하고 있다면 절대 손대선 안될 극악 무도한 불량은 존재한다. 발 한 번 잘 못 들였다간 이번 주 야근은 물론 특근까지 보장해주는 무시무시한 불량! 일반적으로 불량은 그 현상이 명백하고 재현 (동일 불량을 의도적으로 발생시키는 행위) 이 잘 될수록 빠르게 해결된다. 100% 재현되는 불량은 100% 해결된다. 하지만 동일 평가에서 때때로 불량이 발생한다면 골치 아프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타이밍 이슈'라 부른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타이밍 이슈를 해결하며 살아간다. 우리 집 샤워 부스엔 손잡이가 하나 있다. 이 손잡이를 앞뒤로 움직여 온수와 냉수 비율을 좌우로 움직여 수압을 조절한다. 나는 수십 번 샤워 끝에 최적의 손잡이 각도를 체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잡이를 위치시키고 흩날리는 물방울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비명소리.
"앗 뜨그뜨극뜩!!"
조금만 더 뜨거웠다면 온탕에 들어간 라이스페이퍼 마냥 녹아내릴 뻔했다. 분명 수십 번을 문제없이 샤워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타이밍 이슈는 많은 경우 눈앞의 현상에만 집중해선 풀기 힘들다. 샤워기나 손잡이의 기계적인 문제로 인해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순간이 아닌 흐름을 읽어야 한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전 그리고 샤워를 하는 동안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샤워를 하는 동안 가끔씩 일어나는 일들을 되짚어 본다. 세탁기. 세탁기를 돌리고 곧바로 샤워를 하면 상수도 배관에 따라 미세한 수압 및 유량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온수 온도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나?!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우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세탁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만약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동일 현상이 100% 재현된다면 불량 분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타이밍 이슈는 독립적이라 생각됐던 사건들이 서로 간섭하면서 발생하기도 한다. 동일한 행위도 어떤 타이밍에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도, 사랑도 심지어 돈 버는 것도 타이밍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타이밍을 예측하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생각해 보자. 관심 가는 사람이 가진 생활 방식과 이성관이 만들어내는 주파수와 내 주파수 언제 일치할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마음이 커지고 변화는 타이밍조차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식,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무릎에서 사서 머리에서 팔라곤 하지만 어느 타이밍이 무릎인지 어깨인지 알 길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마냥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란 것이다. 피터 드러커 말처럼 타이밍을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이밍을 창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