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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Aug 14. 2021

오천 원짜리 자랑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4

  우리를 한참 키울 때 엄마는 툭하면 자랑을 했다. 그게 자랑인 건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건지 헷갈리는 날도 있었지만 엄마는 대화를 할 때마다 오천 원짜리라는 말을 자주 썼다. “얘 이것 봐. 불난 집에서 반팔 티셔츠를 샀는데 오천 원이지 뭐야?”, “글쎄~ 엄마 불난 집에서 영양크림을 단 돈 오천 원에 샀어.” 이처럼 내가 초등학생 땐 엄마에게 불난 집과 오천 원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고 자랐다. 엄마는 마치 오천 원이 넘는 물건을 절대 사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 사람처럼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불난 집은 전국 단위로 불이 난 가게에서 불에 그슬려 상품 가치가 떨어진 물건만 싸게 파는 점포였다. 그맘때 엄마가 사주는 학용품은 어느 한 부분이 까맣게 타 있었다. 공책 모서리도 까맣고 48색 크레파스 뚜껑도 불에 찌그러져 우글댔다. 초등학생의 내게도 오천 원은 큰돈이라서 엄마의 오천 원짜리 자랑이 그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인 중고등학생 때도 엄마는 오천 원짜리 물건을 샀다. 물가를 생각하면 오천 원에 사기 힘든 물건인데도 어디서 어떻게 샀는지 오천 원에 사 오는 일이 많았다. 드디어 내가 대학생을 거쳐 사회초년생일 때는 오천 원짜리 물건에서 만 원짜리 물건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비슬아. 요 앞 사거리 이불가게에서 이만 오천 원짜리 매트가 달랑 한 장 남았다고 만 원에 사라는 거 냉큼 집어왔다.” 나는 말끝마다 만 원짜리 물건임을 강조하는 엄마의 말습관이 듣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특히 월급 때마다 기분 좋게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백화점이라도 쇼핑할라치면 민망함이 앞선 날도 있었다. 엄마가 어느 여성복 매장 행거에 걸린 옷을 꺼내서 거울 앞에 대보길래 “이거 사줘?” 라고 말했더니 손사래부터 쳤다.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꼭 옷에 붙은 가격표를 뒤집어 보고는 아이코. 세상에. 같은 감탄사를 직원 앞에서 내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면 엄마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면서 점원에게 인사를 한다. 엄마는 여성복 매장을 나오자마자 '0'이 하나 덜 붙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면서 내 등짝을 쳤다.  


  올봄엔 엄마에게 개나리처럼 뽀얀 노란빛의 니트 한 벌이 담긴 쇼핑백을 내밀면서 말했다. “엄마. 이젠 좋은 옷도 사 입고 만 원짜리 옷 샀다는 자랑 좀 그만하고 살자.” 그러자 엄마는 시치미를 뚝 떼며 “얘는 내가 언제 만 원짜리 옷 자랑을 했다고 그러니?” 한다. 엄마는 까맣게 모른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사준 노란 니트를 봉투에서 꺼낸다. “얼마냐고 묻지마. 일부러 가격표 떼 버렸어. 환불도 못하니깐 알아서 하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란 니트를 가지고 안 방 화장대에 비춰보며 예쁘다 화사하다 곱다를 따발총처럼 연발하는 엄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작은 등을 눈으로 쓰다듬으면서 몇 해 전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얘기를 대뜸 꺼냈다.     


   “시골 경찰 용식이가 평생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 덕순 씨한테 밥을 얻어먹으면서 하는 대사가 있어. 그놈의 빨간 티셔츠 좀 그만 입으라고 하거든? 그리고 아들놈이 입다 버린 옷 주워 입지 좀 말라고도 해. 엄마가 죽고 나면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늘 좋은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되게 하지 말라면서. 그거 상처라고 하는 대사가 있어.”     


  그러자 엄마가 어느새 내가 사 온 노란 니트를 입고 뒤를 돌아보면서 대체 빨간 티셔츠가 뭐냐고 물어본다.  2002년 월드컵 때 비 더 레즈라고 쓰여 있던 붉은 악마 티셔츠라고 알려줬더니 엄마는 화장실 락스 청소할 때 입으면 최고라면서 아는 척을 한다. 그리고는 엄마가 자식 옷 입는 게 상처면 세상에 상처가 쌔고 쌨단다. 


  “자식이 기억하는 엄마 모습은 개나리 같았으면 하는 거야. 지금 엄마가 입은 옷처럼.” 


  엄마의 오천 원짜리 자랑이 없었다면 사람 좋아 이리저리 선심 쓰는 아빠 덕분에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었을 걸 안다. 그런 엄마의 노고에 지난 세월을 쓰다듬듯 두 손을 꼭 잡아본다.  엄마 손은 맨날 물이 닿는데도 어쩜 이렇게 개나리 꽃잎처럼 보드랍냐며 한껏 추켜세우니 옛날엔 더 섬섬옥수였다고 한 술을 더 뜬다. 그런데 갑자기 “근데 이거 품이 좀 어벙한 게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며 엄마가 노란 니트를 벗었다. "어마마마. 가격표는 이미 버렸습니다요~" 내가 사극 톤으로 말하자 엄마가 "예예~ 따님. 알겠사옵니다." 하며 노란 니트를 예쁘게 개어 서랍장에 넣는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에는 엄마의 짧은 소감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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