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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Aug 23. 2021

뇌경색 엄마의 뒤늦은 맞짱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6

https://bit.ly/3Danavf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엄마 편을 들지 않았다. 내게는 엄마가 잘했든 못했든 그것보다 궁지에 몰린 엄마를 외롭게 했다는 것에 은근한 쾌감이 있었다. 세 남매 중 엄마에게 가장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던 맏딸이지만 한 번씩 감정이 쓰게 올라올 때면 엄마를 독하게 미워했다. 아니. 미워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부단히 외롭게 했던 엄마를 향한 복수의 마음일 테니깐.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열 달 배 아파 뼈마디 으스러지게 낳아놓고 등골 빠지게 키웠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엄마를 치열하게 미워했던 얘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엄마를 미워했던 건 사실이니깐.


  애초에 엄마에 대한 마음이 예쁜 딸내미까진 아니었어도 엄마 앞에서 꽃받침을 하며 춤을 췄고 빨간 색종이를 곱게 접어서 종이꽃을 선물한 걸 보면 나는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했던 어린아이였다. 그러던 내가 살면서 누구보다 엄마 편이고 싶으면서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복잡 미묘한 양가감정을 가지기 시작한 건 엄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순간에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상처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눈치 빠르고 사랑받을 짓만 쏙쏙 골라하던 여동생은 내 몫까지 엄마의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릴 때의 나는 모든 양보하는 것에 익숙했고 그런 것에 불만이 없던 타고난 성격 탓에 크게 시샘하는 마음은 없었으니깐.


  그러나 엄마가 없으면 세상에 혼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무렵 겪었던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는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한참 키가 클 시기에 키 대신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엔 결국 혼자라는 고독함과 불안증만 무럭무럭 자랐다. 열두 살이던 어느 봄. 나는 친구관계에서 이상신호를 느꼈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늘 하굣길에 손 붙잡고 교실을 나와 학교 현관에서 사이좋게 신발을 갈아 신던 단짝 친구 다희. 엄마가 늘 너보다 피아노를 잘 친다고 칭찬하던 다희가 어느 날부터인지 나를 따돌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나와 놀지 말라고 소문을 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며칠을 끙끙대다가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 문을 두드렸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방 문 너머로 고개를 배꼼 내밀어 엄마를 봤다. 엄마는 영혼까지 뺏긴 사람처럼 집 전화기를 몸에 달고 있었다. 그맘때 엄마와 하루 종일 전화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던 엄마 여고동창 은자 이모나 희경 이모였다. 눈치만 보기엔 내 사정이 너무 급했던 터라 “엄마……. 저, 사실 학교에서요.” 전화기 너머의 친구 말을 들으랴 내가 하는 말을 들으랴 정신이 없었는지 “빨리 말해라. 전화하잖아!” 엄마의 다그침에 그러지 않아도 자신 없던 내 목소리는 모기가 기어가듯 줄어들었다. “저……. 오늘 학교에서, 그러니깐 오늘 학교에서요…….” 절절매는 내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던 한마디.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엄마도 엄마 인생 살 거야.”


  나는 열두 살의 봄날이 지나고부터 엄마에게 내 마음을 얘기하지 않았다. 물어보나 마나 그때 일이 엄마는 뿌연 안개 길처럼 희미할 것이다. 지금 서른 중반인 내 나이보다도 어린 엄마였다. 살림이 어려운 집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하고 싶던 대학 공부도 못하고 덜컥 나부터 임신했으니 소녀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겠지. 소녀와 엄마로 껑충 뛴 간극이 뒤늦은 방황을 만들었으리라.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리는 엄마의 모습도 간극이 크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나와 동생을 빌라 대문 밖에서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마중 나오던 모습. 하루 종일 집에서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초록색 피망과 햄을 썰어 송송 얹고 치즈를 뿌려 프라이팬에 직접 구워낸 따끈한 피자를 주던 엄마. 돈을 벌겠다고 전국으로 건설현장을 돌아다니느라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집을 오던 아빠를 기다리던 엄마의 외롭고 작은 등짝.


  어느 날부터 자신의 존재를 찾아 나서겠다고 방황하던 엄마의 눈동자. 그 눈동자는 밤마다 우리를 재워놓고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며 남편의 부재를 달래거나 하루 종일 친구가 전부인 사춘기 소녀처럼 전화통을 붙잡고 지내던 모습이 아련하게 교차되어 내 머리에 여전히 남아있다.


  중학생이 된 늦봄. 옆 반 친구가 주동했던 따돌림이 학교폭력으로 번져서 한바탕 일이 났던 날이었다. 나는 교실 밖 복도에서 예고 없이 당한 일이어서 그날은 다리가 풀리고 진이 쏙 빠졌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나를 친한 친구가 집에 데려다주었다. “아줌마. 비슬이가 오늘 학교에서 나쁜 친구한테 맞았어요.” 엄마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친구를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온통 정신이 뺏긴 얼굴로 무어라 한마디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다음부터 친구한테 맞고 다니지 말라고 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두고두고 엄마에게 이때 일을 우려먹었다. “이게 다 엄마가 어린 나를 외면해서 내가 불행한 마음으로 자란 탓이겠지! 안 그래?” 엄마와 다른 일로 말다툼을 하다가도 분통을 터트렸고 “걔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다 엄마 탓이야. 내가 자존감 높게 컸으면 버림받았겠어?” 첫 남자 친구와의 이별도 엄마 탓으로 귀결시켰으며 “내 결혼 어그러진 것도 결국 엄마 때문이란 걸 몰라? 엄마의 숨 막히는 잔소리와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말들에 진절머리가 나!” 나는 엄마의 심장 대문에 걸린 빗장을 풀어헤쳐 말 폭탄을 던졌다.


  그 기억이 어찌나 서러웠는지. 살면서 엄마가 부단히 내 마음을 녹여주려고 사과의 눈물을 흘리고 수십 통의 편지를 써도 나는 마음의 응어리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손쉽게 엄마 탓을 했고 나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어쩌면 나의 불행이 엄마의 불행이 되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매번 실패했었다. 글을 잘 써서 문학특기생으로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자만하지 말라며 축하보다 충고를.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신의 용돈은 직접 벌어 쓰는 딸임에도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엔 ‘지만 아는 ’이 되었다. 가뜩이나 엄마의 불행이 내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자격지심이 가득한 나인데. 그래서 생일날에 미역국도 꾸역꾸역 먹던 나인데.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나 커버린 내 마음이 엄마에겐 다다르지 못했었나 보다. 나는 엄마에겐 늘 부족한 딸이었다.


  우리 모녀가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서른이 넘어있었다. 그해 8월. 그러니까 엄마가 뇌경색 판정을 받은 지 두어 달이 넘어갈 때쯤. 엄마는 집에서도 가갸거겨, 아에이오우- 하며 언어재활치료에 열을 올리던 한 여름. 무더위에 매미가 나무에서 찢어지게 울던 날. 엄마는 난데없이 아파트 이웃인 위층 아주머니와 속된 말로 '맞짱'을 뜨고야 말았다. 나는 한참 국가자격증 공부를 한다고 주말이면 집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이론서를 달달 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엄마 장난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진짜 드라마인 줄~ 시트콤인 줄~ 눈물 나게 슬픈데 웃기고 하여튼 들어봐.”


  전날 밤. 엄마가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면서 눈물 콧물 쏟아가며 한바탕 퍼붓고 집을 나왔던 터였다. 나는 뇌경색 환자인 엄마 대신 살림을 돕다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엄마 살림을 조금 나눠서 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때때로 환자로서 밀려오는 두려움과 짜증을 감당하는 것이 내겐 더 힘든 몫이었다. 그래도 그 말까지 하면 안 됐는데 기어이 내뱉은 게 화근이 되고 만 것이다. “나 결혼 어그러졌을 때도 엄만 그랬어! 위층 아줌마가 아파트 단지 지나가던 나한테 혀 차면서 비웃을 때도 엄마는 가서 따지지도 않았잖아.”


  그러지 않아도 아픈 엄마에게 퍼부은 게 미안해서 저녁때쯤 집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엄마가 윗집 아줌마와 맞짱이라니……. 그것도 성치 않은 몸으로 말이다. 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생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하게 말 좀 해보라고 재촉했다. “언니 어제 울면서 집에 가고 나서 엄마가 무지 속상해했어. 엄마 표현은 잘 못해도 그 아줌마 진짜 분통 터져했었거든. 근데 엄마가 가서 따지면 언니가 더 속상해할까 봐 꾹 참은 거래. 내가 일단 엄마 몸부터 생각하라니깐 갑자기 노트를 펼치고 글씨를 쓰더라고? 그러더니 한 시간 뒤에 내 방으로 와서 이 대사 어떠냐면서 연기하듯이 읽는 거야. 이제라도 어린 시절에 못해준 거 다 해주겠다면서.” 나는 노트에 무슨 내용이 써져있었냐고 물었다. 괜히 침이 꼴딱 넘어갔다.


  “당신. 얼마 전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나한테 뭐라고 했어? 우리 큰 딸이 아줌마 마주칠 때마다 인사 안 한다고 인생이 창피해서 그러는 거냐고 비아냥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대꾸하기도 아까워서 넘어갔는데 말이야. 더 이상 못 참아! 창피한 건 대학교도 속이면서 시집간 당신 딸이 부끄럽지 우리 딸이 뭐가 부끄러워. 엉? 동네에서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못난 사람이라고 소문난 줄은 알고 인생사는 겁니까? 내 딸 마음에 지금도 멍울이 크니깐 당장 사과해! 사과하기 전까지 내가 이렇게 동네방네 소리 지를 거야! 엉?”


  전화기 너머 동생 얘기를 한참 듣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생한테 왜 엄마를 말리지 않았냐고 다그쳤더니 말렸어도 엄마는 이미 총알 장전까지 마친 전투 상태였다고 전했다. 엄마는 생전 식구들한테나 잔소리로 윽박지르는 정도였지 동네 아줌마들이랑 작게 싸움 한 번 못해본 사람이었다. 말싸움 하나는 끝내주는 여동생이 차라리 본인이 찾아가서 아줌마를 혼쭐 내주고 온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 아줌마는 평소에도 이웃들의 불행에 웃고 행복에 부아를 치밀어했던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한 편이었다. 그래도 우리 엄마한테 이런저런 도움을 받고 산 세월이 길었는데 엄마도 아줌마의 인성까지 어찌할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내 마음이 그때 조금 더 온전했더라면. 위층 아줌마의 실언에 허허실실 웃어넘겼을 법도 했겠지만 나는 돈도 직장도 함께 잃었던 때라 그런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이 두고두고 그렇게나 아팠나 보다. 동생은 엄마가 발음이 안 꼬이게 혼쭐을 내주겠다면서 몇 시간을 노트를 보고 연습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뇌경색이 언어기능으로 와서 아직 호전되지 않아 발음이 살짝 어눌했던 엄마였다.  


  “세상에나 언니. 엄마가 아파트 복도에 나가서는 동네 사람들~! 신문고 북 치듯이 소화전을 쾅쾅 내리치더니 아줌마를 묵사발 만들었다니깐.” 여동생은 평소에도 말을 재치 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심각한 것도 신파적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전해야 할 내용은 빠짐없이. 동생은 맞짱 얘기를 한참 하더니 “엄마든 나든 간에 언니 편이야. 꼰대~ 라떼~ 인성 불량 동네 아줌마한테 기분 상할 것도 없어.”


  나는 동생의 말에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었다. “엄마가 언니한테 많이 미안해하더라. 일찍 시집와서 애 낳고 엄마도 사춘기를 언니 키우면서 뒤늦게 겪어서 언니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면서. 그땐 아빠랑 사이가 안 좋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언니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게 천추의 한이래.”

   

  "그리고 언니. 엄마가 지켜주지 못해서 죽을 만큼 미안했대.……."  


  .


  .


  이제야 엄마를 엄마가 아닌 여자. 처음 겪어보는 일엔 실수투성이인 여느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못난 딸인데 엄마는 어떻게든 품으려고 하네. 이젠 알아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어렵고 두려웠다는 걸. 앞으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끼리 오순도순 삽시다. 정 여사.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에는 엄마의 짧은 소감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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