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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Sep 16. 2021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 ep.9

  “와. 자식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치트키를 썼네.” 나는 그러지 않아도 낮에 올해의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일정을 확인했던 터라 불판 위 마른오징어처럼 속이 타들어간 심정이었다. 퇴근하고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데 이건 뭐 불판 위 오징어는 저리 가라다. 복싱용 헤드 가드도 소용없다. 친구라는 게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턱밑만 무자비로 가격하듯 팩트 폭격을 했다.


  “세상 어떤 딸내미가 엄마 마음을 다 알겠냐만. 앞길 가로막는 부모 만든 건 겁나게 이기적이라는 거지.” 나는 친구의 무자비한 폭격에 내가 엄마한테 너무했지 하면서도 그렇지마는 하지만 등의 변명 부사를 갖다 붙이기 바빴다. 친구에게 너도 익히 알고 있지 않느냐고 서운함을 표했다. 내가 얼마나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기대했는지를 말이다.


  글을 쓰는 일로 엄마와 서먹해진 게 벌써 일주일째다. 딴에는 종국엔 내가 어떤 책을 내고 싶은지 왜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글로 엮으려는지. 앞에서 실컷 떠들어댔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들은 바가 없다고 하니 받아들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살면서 엄마와 나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들을 쓰고 그걸 엄마에게 보여주는 형식으로 글을 쓰겠다고 했다. 엄마가 그저 내 글에 화답으로 몇 문장 써주는 설정이 뭐 그리 힘든 일일까 싶은 마음도 컸던 게 사실이다. 수고스럽고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들 우리 모녀 사이에 이미 나눴던 이야기들이 대부분일 테니깐. 내 글이 엄마에게 새삼스럽게 다가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매번 한 두 꼭지의 글을 보여주고 나면 엄마는 기어코 태클을 걸었다. “꼭 이렇게까지 써야 하니?” , “CCTV 재생하는 것도 아니고 곧이곧대로 쓰지 말고 좀 우회적으로 써봐. 그게 세련된 글쓰기지.” 나는 엄마가 조언할 때마다 기분 좋게 넘기는 날도 있었지만 엄마가 글쓰기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새침을 떨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는 뭐 다른 줄 알아? 가르치려는 그 특유의 말투가 짧은 화답 글에서도 보인다. 보여!” 하며 내가 시비를 걸 때도 있었다. 우리 모녀는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호흡을 맞추며 글을 썼지만 이번엔 달랐다. 엄마 문자는 통보에 가까웠다.


  「너 글에 답해주는 거 이제 하나만 더 하고 안 할까 해. 엄마는 이제 할 만큼 한 것 같아. 예전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는 엄마가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앞니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 저변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다. 정말 솔직해지자면 또 시작이네 싶었다. 어쩐지 엄마랑 손발이 척척 맞는다 싶었다. 이따금씩 내 글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때마다 엄마 비윗장을 살살 맞추면서 화답 글을 받아내는 기분이 들었던 터였다. 나야말로 이번엔 단단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회사에서 오전 업무를 보다 말고 득달같이 비상구로 내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이러기야? 딸이 좀 해보겠다는데 글 몇 줄 써주는 게 그렇게 싫어?” 나는 나무 기둥을 주둥이로 박는 딱따구리처럼 틈새 없이 쪼아댔다. 오전 댓바람부터 퍼부어대자 전화기 건너편의 엄마는 얘, 내 말 좀 들어봐라 하며 말을 꺼내려했지만 나는 내 말만 했다. 그리고는 “엄마는 살면서 나 하고 싶다는 거 팍팍 밀어준 적 없잖아. 그게 앞길 가로막는 거지 뭐야?” 기어코 이 말을 내뱉고야 만 것이다. 친구가 말하는 치트키였다. 부모에게 세상 가장 강력한 치트키는 자식 앞길 막지 말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친구 말이 맞았다. 나는 겁나게 이기적이었다. 나야말로 엄마와의 에세이를 쓰기 전에 이런저런 구상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갑자기 백 미터 달리기를 강요받은 꼴이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내내 혼자 글을 쓰면서 시간적으로도 워밍업을 마친 상태였으니 그저 숨 가쁘게 상쾌하게 달리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엄마. 지금 메일로 원고 보냈거든? 점심시간까지 읽고 피드백 줘.” , “엄마. 저녁 먹고 화답 글 써서 보내줘. 어차피 몇 줄이면 되잖아.” 이렇게 내 입장만 고수했다. 그럼 엄마는 원고를 재촉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거였구나 하는 나의 말에 친구는 “전화통화 아니고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거였다면 등짝 한 대 치고 싶다.” 하며 친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엄마라서 못하겠다는 거였다. 엄마는 내 글에 화답 글을 써주는 게 힘들었던 게 아니었다. 가슴팍이 쓰라리고 아려서. 내 딸이라서. 내 자식의 아픔이나 힘들었던 과거가 오롯이 심장에 박히는 기분이라서. 그건 엄마만이 아는 감정일 것이다. 이래서 자식은 평생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말이 있나 보다. 나는 부모가 돼가지고 딸자식이 이렇게 외롭고 인생에 아파할 때 뭐했던 건가 새삼 죄인의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자식의 아픔에 대신 아파줄 수 없었던 과거의 순간들이 가슴을 죄었을 테니깐 말이다.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던 다음날. 모처럼 평일 휴무라 돗자리를 챙겨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기둥을 등받이 삼아 책을 읽는데 우거진 수풀 너머로 야트막한 개천가 물줄기가 반짝였다. 평소였다면 집과 오 분 거리의 부모님 집에 가서 아침밥을 얻어먹었을 텐데. 일주일 넘게 나도 생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이북리더기를 장만한 기념으로 잔뜩 구매한 신간 도서들이 잘 읽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엄마 집에 가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와의 에세이를 쓰는 건 출간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노라고. 엄마 얘기를 쓰는 진짜 이유. 그건 바로 엄마와의 화해를 통해 위로받았던 지난날들에 대한 매듭이라고.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든 엄마 딸 사이에 응어리진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이다. 모든 엄마와 딸이 회복의 길목에서 마주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라고 엄마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싶어졌다.


  마음으로는 대화가 잘 되는데 왜 엄마와 직접 마주 보고 앉으면 진짜 할 말은 쏙 빼고 뱅뱅 돌려 말하는 걸까. 그때 거짓말처럼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글 써서 줘. 엄마는 네가 출간 계획이 있다는 건 잘 몰랐다.」 우리 엄마도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양반집 아가씨는 글렀을 거다. 나는 일주일의 고민이 무색하게 문자를 보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호수공원에서 돗자리 펴고 앉아있어. 엄마 어디야?” 대뜸 어디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 보러 나왔다면서 그리로 간다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나는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엄마와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엄마와 이렇게 화해하고 살아가서 너무 좋다고. 엄마랑 딸이 마음의 응어리를 갖고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쓰는 엄마와의 글들이 그리고 엄마가 내 글에 대해 화답을 해주는 글이 세상의 엄마와 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도 전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남을 위로해주고 싶은 글쓰기를 하고 싶어 졌다고 말이다.


  엄마는 사뭇 진지한 나의 말들에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응원한다고. 엄마는 글쓰기가 뭔지 그런 건 당최 잘 몰라도 그냥 너의 뜻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말했다. 단지 엄마가 화답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건 내 딸내미가 지난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다시 아파질까 봐 두려웠던 거라고. 그리고 본인도 많이 아팠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엄마. 형식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냥 쓰고 싶은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게 진짜 글이겠지."


  내 말에 엄마는 별다른 대답 없이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를 물었다. "저녁에 고등어 사다가 무 넣고 조림해줄까? 너 그거 좋아하잖아. 호수가 개천가에 벌써 코스모스가 폈네?" 나는 엄마의 밥타령이 좋다. 온전히 자식으로서 사랑받는 느낌이다.  엄마가 돼서 이것밖에 못 해줘. 엄마가 뭐 이래. 엄마가 언제 내 앞길 떵떵 밀어준 적 있어하며 꼭 엄마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사람처럼 고약한 심통을 내는 딸에게도 부드러운 손길로 인생을 구원해주는 엄마. 이렇듯 하느님. 부처님. 천지만물 우주 신보다도 내 인생에 등불이 되어주는 건 언제나 엄마다.




※  <그렇게 엄마를 닮아간다>의 연재 글마다 엄마의 짧은 소감문이 하단에 실립니다

- 딸이 쓴 글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엄마가 딸에게 화답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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