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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Sep 21. 2021

한강에 가면 추억 하나쯤은

  평일 아침 여의도 한강 공원은 한적했다. 집 근처에 호수를 낀 공원이나 유원지도 그런대로 기분을 내기엔 충분하지만 이번엔 무조건 한강이었다. 백신 접종을 했어도 마스크 시국인 만큼 사람이 덜 붐비는 이른 시간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내리고. 운동화를 신고 가을바람을 가르며 여의도역에서 여의나루 역까지 걷는 길이 산뜻했다.


  푸른색이 곁들여진 밝은 그레이 톤의 잔잔한 한강의 물결이 마음의 평온을 안겨주었다. 여름 볕보다 존재감이 확실한 가을볕에 서 있으니 머리 위가 쨍쨍했지만 이대로도 좋았다. 한강의 물결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멀리서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친구는 브라운 계열의 플레어스커트에 맑은 빨간색 구두를 신었는데 약간 노을 지듯 노란빛을 내는 하늘과 무척 잘 어울렸다.


  우리는 가장 큰 나무 밑에 대여한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간단한 음료수와 초콜릿이면 충분할 만큼 날씨가 모든 몫을 대 해내는 가을이다. 한강 공원은 늘 사람이 많지만 평일 오전은 바람, 나무만이 반겨주는 것처럼 한적한 모습이었다. 말없이 공원의 초록 기운을 만끽하는데 친구가 한강을 생각하면 흑역사가 떠오른다고 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나. 여하튼 그때 당시 가장 친하게 지내던 본인의 친구가 자꾸만 소개팅을 받으라고 졸랐다고 했다. 워낙 남자에 큰 관심이 없던 지라 아마 소개팅 제안에 떨떠름했을 거였다.



   첫 소개팅, 커플 자전거


  친구는 3도짜리 복숭아 맛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얘기를 이어갔다. “내 생각엔 아마 그때 그 친구가 커플 데이트를 하고 싶었나 봐. 자기 남자 친구의 친구를 자꾸만 소개받으라고 하면서 어느 날 한강 공원으로 나오라더라?” 친구는 시큰둥한 나의 표정에 자, 이제 집중해보라며 이야기에 양념을 넣기 시작했다.


  억지로 한강 공원으로 끌려 나간 친구는 원치 않는 소개팅을 했고 만난 지 오 분만에 커플 자전거를 탔다고 했다. 내가 그게 가능해? 하고 묻자 친구는 그래서 흑역사라고 했다. 게다가 본인은 치마를 입어서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보기 좋게 거절했는데 친구의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구겨진 쇼핑백에서 청바지를 하나 꺼내 들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근데 또 그걸 순진하게도 첫 소개팅에 남자를 만난 지 오 분 만에 한강 화장실에서 주섬주섬 갈아입었다는 게 결정타였다. 통성명을 하자마자 화장실에서 치마를 청바지로 갈아입고 낯선 남자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탄 한강 커플 자전거. 나는 나름 운치 있는 기억인데 별게 다 흑역사라고 하니깐 친구가 서른이 넘은 지금은 돈을 줘도 못할 행동이라면서 웃는다.


  한강 수영장, 첫 비키니


  네게 첫 소개팅과 커플 자전거의 추억이 있다면 내겐 한강 수영장과 첫 비키니가 있다고 응수했다. 친구는 네가 무슨 비키니를 입었던 때가 있냐면서 의아해했지만 정확히 스무 살이었다. 남자 친구 손만 잡아도 길거리에 꽃잎이 흩날리는 기분이던 때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융통성이 모자란 대나무 같은 아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내가 비키니를 입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입는 비키니가 뭐라고 할 테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비키니를 입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추억이라면 이것도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이 되고 사귄 첫 남자 친구였다. 온 가족 총출동하는 한강 수영장이 뭐 대수라고 나는 한강 수영장 탈의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더 기다려야 해? 무슨 일 있어?” 약속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고도 탈의실에서 나오지 않자 남자 친구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나는 문자를 받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수줍게 몸을 배배 꼬며 한강 수영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길을 지나가다 그 애를 본다면 "넌 내가 비키니를 입게 한 남자였어." 라며 떠올려야 하나.



  이젠, 한강 공원 비둘기의 끼니를 걱정해주는


  우리는 첫 소개팅을 한 지 오 분만에 한강 탈의실에서 청바지로 갈아입고 커플 자전거를 탄 기억. 그리고 대학생 때 사귄 첫 남자 친구와 한강 수영장에서 첫 비키니를 입고 물놀이를 하던 기억. 지금은 그런 것들이 잔디에서 부지런히 부리를 쪼아대는 비둘기의 끼니 걱정보다도 부질없다면서 마스크 안으로 한강 공원의 상쾌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옆 자리에 앉았던 커플들이 아침부터 부지런히 보쌈을 시켜먹고 야무지게 쓰레기를 치우더니 왜인지 먹다 남은 새우젓을 잔디에 뿌렸다. 그걸 열심히도 쪼아 먹던 비둘기를 보며 친구는 무심한 눈동자로 “쟤는 짜게 먹는 스타일인가 보네.” 하는데 그 말이 너무 웃겨서 나는 돗자리에 그대로 드러눕다시피 웃었다.


  새우젓 때문인지 멀리 있던 비둘기 떼가 우리가 앉은자리로 모여들어 잔디를 쪼아댔다. 조류 공포증이 있는 내가 법석을 떨자 친구는 또 한 번 무심하게 “먹고사는 일보다 더 급한 게 어디 있냐. 쟤도 쟤 나름 인생에 고군분투하는 거니 어여삐 봐줘라.” 하며 남은 맥주를 입 속으로 탈탈 털어 넣는다. 왠지 이번 휴무 때는 한강에 가고 싶더라니. 가을도 오고 하늘도 높으니 지나간 작은 추억 조각을 떠올리고 싶었나 보다. 구름이 몽실한 서울 하늘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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