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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Nov 04. 2021

날씨가 아니라 마음이 추운 거겠지

  가끔 낯선 동네에 가는 게 좋다. 처음 타는 번호의 버스에 올라타는 일. 살면서 한 번도 내리지 않을 법한 생소한 전철역의 역사 안을 잠시 헤매는 일. 그렇다고 목적지도 없이 길거리를 헤맬 기회가 많지 않아서인지 가끔은 낯선 곳에 가는 일이 설레기도 한다. 복잡한 길거리에 혼자 섞이지 않은 고유한 물질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기분. 어느 땐 그런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모든 게 익숙해진 관계나 환경보다도 좋다.


  그날은 낯선 동네로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생경한 동네의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는데 그 앞에 좌판을 깔고 과일을 파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아무도 눈길을 줄 것 같지 않은 허름한 비닐 천막 안에 나무판자 몇 개를 이어서 만든 초라한 좌판이었다. 바쁘게 길을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과일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는 할아버지를 보자 갑자기 귤이 먹고 싶어졌다.


  손끝이 시린 계절이라서 좌판 위에 귤이 더 맛있어 보였다.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귤이 높게 쌓여있었고 그 너머로 좌판 과일 장사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인다. 마치 '저 사람이 내 귤을 정말 사줄까?' 하는 간절함 같은 게 묻어났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과일로 가져가실래요"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귤을 가리키며 한 바구니를 달라고 했다.


  검정 비닐봉지에 귤을 급하게 담아내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분주했다. 마음처럼 힘이 따라주지 않는 지 두어 개씩 잡아든 귤이 자꾸만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좌판 밑으로 떨어진 귤을 봉지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나를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처진 눈꺼풀. 혹시 저 여자가 떨어진 귤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수심 어린 눈빛에서 찬바람보다 더 시린 한기가 서린다.


  내가 잔돈을 거슬러달라면서 지폐 몇 장을 내밀자 할아버지는 돈을 휙 낚아채서 몇 걸음 뒤로 빠졌다. 꽁꽁 언 거친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돈을 세는 모습에서 마음이 추운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종종 그런 눈빛을 보곤 했다. 손에 움켜쥔 것마저 날아갈까 바짝 오그라들어 있는 눈. 마음이 추운 사람들에게 보이는 눈빛.


  날씨가 추우면 두꺼운 옷을 꺼내 입지만 마음이 추울 땐 시린 마음을 날 것으로 견뎌야만 할 때도 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버티다보면 어느새 기적처럼 언 마음이 녹아내리는 봄빛이 비친기도 한다. 아마 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양손바닥을 빠르게 비비던 좌판 과일 장사 할아버지가 녹이고 싶던 건 손이 아니라 마음이었겠지 싶다. 이따금씩 그런 추운 눈빛과 조우하게 되면 나는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다. "요즘 어때요?" 하면서 얼어붙은 눈동자를 녹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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