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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Aug 03. 2023

여름은 낭만이야

- 우리의 독서캠프


"고기 굽는 건 안 돼요. 정말 죽어요. 60명? "


"그럼 뭐가 좋을까요?"


"도시락, 요즘 도시락 좋아요."


별밤독서캠프 때, 조별로 삼겹살을 구워 먹도록 하겠다는 나의 거창한 계획을 들은 동료들이 진심으로 우리를 걱정했다.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더운 여름에 모기가 득실대는 산 아래 학교에서 고기를 굽는다,  정말 안 될 일이었다. 더위와 모기는 그렇다 치고, 고기는 누가 굽고, 날리는 기름, 새는 기름, 튀는 기름, 그걸 다 어쩌겠느냐며 모두들 한입씩 거들었다. 그런데도 그 걱정에 나는


"낭만이 없잖아요. 별밤인데." 하며 낭만 타령을 했다.


이 한 마디에 점심을 먹고, 한가롭게 서 계시던 수학 선생님은 발을 구르며 박장대소를 하셨다. 도대체 고기 굽는 건 뭐가 낭만이냐고, 도대체 선생님의 낭만은 뭐냐고.


"라면이라도 먹어야 낭만이 있지 않을까요?"


라면과 고기에는 있지만, 사각 플라스틱에 밥과 반찬이 가지런히 담긴 도시락에는 없는 낭만.

차례대로 도시락 받아 들고 쪼르륵 앉아 밥을 먹는 건, 일단 낭만적이지 않아 하고 싶지 않은 나의 마지막 선택이었지만, 나의 낭만과 효율을 모두 담보할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계획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캠프 식사 총책임을 맡은 선생님이 이런 내 마음을 간파하셨는지, 조별로 같이 나눠먹는 닭강정에 개인별 주먹밥,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저녁 메뉴를 정해주셨다. 그래, 이건 조금 낭만이 있어 보였다. 나눠먹으니까.


캠프를 시작할 때는 미처 몰랐던 나의 흐릿한 낭만은 캠프가 진행되면서 점점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책임 교사인 내가 한 일은 캠프 주제와 전체 흐름을 잡고, 우리가 읽을 책을 선정하고 강사 섭외한 일뿐이었다. 그 이후 참가자 모집에서 기획단 운영과 프로그램을 섬세하게 다듬는 모든 일들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일'로 기꺼이 받아들인 우리 국어과 선생님들이 함께 해주셨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명찰을 빌려오기도 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 기획단 아이들을  지도하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챙겼다. 자기 것으로 그 일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학년을 섞어놓았더니 형, 동생 하며 친해지더니 캠프가 시작한 지 10시간이 넘은 밤 9시가 되어서도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이게 뭐라고!  방학식날 밤까지 남아서 형, 동생, 친구,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한 그 일을 부여잡고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려는 무용한 열정. 내가 발견한 첫 번째 낭만이다.  


캠프 당일, 지나가는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를 응원해 주셨고,  수학, 생물, 음악, 중국어, 진로, 한문, 정보 등 타 교과 선생님들도 행사장에 들러 아이들을 격려하고, 2시간 30분 넘게 진행된 강연에도 귀를 기울여주셨다.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없어도,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어도 동료에게 슬쩍 건네보는 수줍고 따뜻한 마음, 그리고 교과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반짝이는 호기심, 경계를 가로지르는 설렘을 즐기는 어린아이의 마음. 이것이 내가 발견한 두 번째 낭만이다.

2023.7.18

꿈담카페에서 모둠별 독서를 했다. 습기 찬 하늘을 뚫고 붉은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정년을 앞둔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노을이 진다. 나가자" 소리쳤다. 우르르 달려 나간 아이들이 시원한 여름 저녁을 만끽하며 삼삼오오 하늘 사진을 찍었다. 노을이 진다, 북한산 위로 핑크색 하늘이 펼쳐진다,  분홍색 하늘을 보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북한산노을인데도,  그 노을을 그저 보내지 않고, 움켜잡고 즐기는 마음, 이것이 내가 발견한 세 번째 낭만이다.


결국, 네모 플라스틱 도시락이 담아내지 못한 나의 낭만이란, 함께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섬세하게 나와 타인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과 학생, 북한산의 핑크색 노을, 앵봉산의 푸르름. 여름밤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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