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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세 Dec 05. 2024

존재만으로 내게 위안이 되는 당신께.

네 번째 편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커다랗고 조용한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의 옆모습을 제가 바라보고 있었지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영화에  나오는 멋진 신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지도 않고 눈을 깜빡이는 남자가 내게서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가 저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남자의 형체가 천천히 일그러지며 사라지는 것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중한 그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하루종일 잊히지 않더군요.

남자의 눈동자를 떠올리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가 제게 침묵의 위로를 전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위로는 고독 속의 고독을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하지요.

누가 저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는 분명히 이해하시겠지요?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지요.

아무래도 저는 당신과 같은 사려 깊은 어른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 어른이 신사의 모습으로 발현되어 나타난 거겠지요.

어쩌면 제가 존경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형상화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꿈을 꾸기 며칠 전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1993년에 소담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을 구매 후 딱 한번 그것도 대충 읽었는데 다행히 여러 번의 이사를 거쳤음에도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잠들어 있더군요.

책이 저를 불렀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마음이 힘든 제가 발견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요.

20여 년 전에 읽었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던 ‘젊은 시인에게‘라는 편지글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다시 읽으니 펑펑 눈물을 쏟을 정도로 감명을 주더군요.

이런 부족한 내가 과연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자신감이 없던 제게 크나큰 위로를 전해주었지요.

마음에 크게 와닿은 몇 가지 문구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창조하는 자에게 가난은 없으며,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하찮은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귀가 제게 와닿은 이유는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던 나무가, 꽃이, 하늘이, 구름이 모두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귀를 기울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파고들어서 당신 생명의 그 깊은 근원을 느끼도록 하십시오.‘

그제야 저는 음소거를 눌러놓은 사람 것처럼 귀를 막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저의 감수성과 극도의 예민함이 삶의 장애물처럼 생각되었거든요.

글쓰기로서 제가 억지로 눌러놓은 음소거를 드디어 해제하게 된 겁니다.


당신께서 제가 갑자기 말수도 적어지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던 모습을 걱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셨다는 걸 잘 압니다.

그때의 저는 소리를 처음 듣게 된 사람처럼 무척이나 당황스러웠고 그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누구에게도 표현하기 힘든 제 마음을 이해를 받은 기분과,

제가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속의 오랜 바람을 완강히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지요.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 그 어떤 보답도 염두에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릴케의 묵직한 조언대로 저는 좋은 글쟁이가 되기 위해 조용하고 진지하게 저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며 내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보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릴케나 카프카처럼 훌륭하고 위대한 작가가 될 자신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저 마음 한 덩이를 잘라 종이 위에 올린 걸 혼자만 보고 간직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내보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알려드리려 하는 겁니다.

당신께 보내지 못한 편지를 플랫폼에 공개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완성한 글을 수줍게 내보일 기회가 많아진 요즘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이런 제 생각을 당신께 두서없이 밝혀 당황스러워하셨지요. 그에 편지로서 차근히 설명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존경하는 릴케보다 더 당신이라는 존재가 제게는 커다란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제 마음을 이해하는 걸 떠나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의 편이 되어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당신께서도 오늘 밤 좋은 꿈을 꾸셨으면 좋겠습니다.

-초보 작가 윰세 올림

추신) 꿈에서 본 남자의 얼굴을 그려보았습니다. 이제 보니 책 소개의 릴케의 초상화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네요. 제 무의식이 야무지게 위대한 시인의 초상화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속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초상화
꿈에서 본 신사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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