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주도에서 가을 마중하기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여행

by 현이


남자친구와 제주도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계획에는 없던 여행이라 우리에겐 나름 ‘갑자기 여행’이었다. 없던 계획이 생긴 이유는 그가 학생 때부터 노래를 듣곤 했던 가수가 제주도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제주도에 있는 어떤 공간에서 Fall Folk 라는 이름으로 몇 주간 무대가 있고, 그 가수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가수의 공연을 빌미(?)로 우린 제주도로 향했다. 1박 2일은 짧으니까 최대한 이른 비행기를 탔다. 새벽에 일어나 6시 20분 비행기를 탔고, 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로 평소와 같다면 출근도 하기 전의 시간에 도착했다는 게 짜릿하면서도 좋았다.


김녕해수욕장

공연은 우리 여정 중에서 둘째 날이었기 때문에 첫날을 온전한 여행으로 채웠다. 공항에서 가까운 김녕 해변에 잠시 내려 올레길을 걸었다. 가을의 투명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바다는 남색, 에메랄드색, 푸른색까지 너무나 아름다운 색을 품고 있었다. 곳곳이 표시가 있는 올레길을 따라 가볍게 걸었다.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가을의 모습이었다. 바다가 있는 곳에서 며칠 지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은 것도 잠시 그저 이 순간이 있다는 걸 즐기기로 했다.



윌라라 피쉬앤칩스

날씨가 좋아 우도에 갈까, 성산일출봉에 갈까 얘기하며 자리를 옮겼다. 우도에 가려면 배 시간을 맞추어야 했기에 우리는 조금 더 여유 있게 돌아다닐 수 있는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피쉬앤칩스 가게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지난번에 함께 왔던 식당에 다시 들를 수 있어 좋았다. 지난 여행 때의 좋은 기억, 이번 여행에서의 새로운 감상이 교차해서 좋다. 추억을 하나 더 쌓아 올리고 간다.



일출봉 오르는 길 펼쳐진 푸른 언덕

성산일출봉은 중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왔던 곳이다. 10여 년 만에 성산일출봉을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처음 보는 풍경처럼 다가왔다. 초록색 풀밭이 넓게 깔린 커다란 언덕처럼 보였다.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무료 코스와 유료 코스를 골라야 했다. 나는 이미 듬성듬성 줄지어 푸른 언덕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미 마음을 빼앗겨 유료 코스로 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멀리서 보는 것과는 실제로 올라가는 건 역시 조금 달랐다. 오 괜히 했다 싶으면서도 남자친구는 이왕 올라온 김에 가야지! 라며 나를 격려했다. 얼마나 높은지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에 이를 어쩐다 하면서도 손을 잡고 길에 올랐다.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출봉 중턱 매점에서 "10분만 더 가면 된다" 라며 응원을 보냈다. 다행히도(?) 성산일출봉은 기억 속의 고도보다 꽤 낮았다. 오르며 기억을 더듬다 보니 그래- 여기 왔었지 라며 중학생 때의 내가 지나가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10년이 넘어서 다시 오다니)


일출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곧 정상에 올랐다. 그때의 기억과는 아마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아 분화구에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정상에 오른 기분을 즐겼다. 같이 올라온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처럼 숨을 고르며 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일출봉에 오른 뒤 "해냈다"며 무척 좋아했다. 성산일출봉에 오르는 건 계획에 전혀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는 시원한 바람으로 땀이 충분히 식어갈 즈음 하산했다. 하산하면서 무료 코스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다 위 가파르게 깎인 커다란 암벽 같은 성산일출봉의 옆모습이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의 시간을 하나 쌓아 올렸다.



사라다빵, 단팥빵, 쑥꽈배기 모두 맛있다

다음날 아침 다미안이라는 빵집에서서 간단히 빵을 먹었다. 내가 빵을 좋아해서 남자친구가 가기로 계획한 가게였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과 아침에 빵을 먹는 상상을 하는데 그걸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 우리는 가볍게 하나 나누어 먹고, 한라산 아래 메밀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 안갯속에 보이는 한라산이 무척 웅장해 보였다. 다음 제주에 올 때는 체력을 길러 한라산에 가보자는 얘기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이번에 성산일출봉을 완등했으니 아마 우리가 한라산에 오르는 날도 있을 것이다.



소품샵 올망

공연 시간을 맞추기 편리하도록 시내로 왔다. 비가 내려서 밖을 걸어 다니기보다 시내에 있는 소품샵을 구경했다. 그중 마음에 들었던 곳은 네다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지내는 '올망'이라는 가게였다. 제주도에서 낮은 돌담과 그 너머 작은 집들을 좋아하는데 소품샵도 그랬다. 잔디마당 위에 밝고 편안한 분위기의 소품샵이 있었다. 고양이들이 마음 편히 돌아다니며 쉴 수 있는 공간들이 간혹 있다. 그런 곳은 왠지, 빨리빨리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와 같은 분위기가 당연한 보통의(?) 장소들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 너그럽고 느긋한 공간 같다고나 해야 할까.



관객들을 위해 준비된 귤과 빵.. 너무 따뜻했다

공연 한 시간 전에 공연장소에 도착했다. 비를 뚫고 운전해서 도착한 곳에서 스태프분이 우리 차를 보고 뛰어 마중 나오셨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멀리서부터 반갑게 인사를 해주셔서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우드톤의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예쁘게 준비된 무대와 객석이 보였다. 스태프는 우리에게 공연이 시작되기 전 준비된 빵과 귤을 먹으며 쉬면 된다고 안내해 주셨다. 어제 일찍 출발해서 조금 피곤하기도 했던 우리에게 기대에 없던 따뜻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맨 앞 소파자리에 앉아 커피와 빵, 제주 감귤을 먹으면서 공연을 기다렸다. 수수한 대화가 오가는 장면들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따뜻한 응대와 이 좋은 낯섦 덕분에 우리에게는 기다림보다 휴식 같은 시간이었다.


가수 김목인님, 함께한 플루티스트로 이동열님

김목인이라는 가수. 남자친구와 그의 노래를 종종 들었다. 멜로디에는 컨트리풍의 편안함이 있고 직접 쓴 가사가 어렵지 않고 시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처럼 관객과 가까이 마주 앉아 열리는 소규모 공연과도 매우 잘 어울리는 곡들을 많이 부르는 가수이다. 곡마다 부르기 전에 가사가 쓰인 배경을 대화하듯 전달해 주셨다. 곡과 가사에 대한 가수의 경험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서 작품을 긷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수와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분도 공연에 함께해서 더 풍성한 무대였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공연을 가까이서 듣고 보는 것 역시 벅찬 경험이었다.


곡에 대한 대화와 공연을 함께하는 동안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는 사람, 가을비가 서늘히 내리는 밤 이곳의 따뜻함, 좋은 음악.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빵과 감귤은 가수 김목인을 좋아하는 팬(이자 제주도의 상인이기도 한)분들이 협찬했다고 한다. 여기 온 모두가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던 가수의 공연을 같이 가서 보던 날.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온다는 말은 아마 이런 의미인지도 모른다고. 쌓아온 시간들을 현재에 다른 방식으로 공유하고, 예상에 없던 좋은 시간을 함께 쌓아 올리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에 대해 크고 작은 꿈을 그려갈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