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의무를 반복 이행하는 일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결심을 실천하는 사람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반면 의무를 잊어버린 행실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후배가 있다. 어느 순간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하나의 조직이 돌아가기 위해선 맡은 업무뿐만 아니라 업무지원도 필요하다. 너무 바쁜 순간에는 고개를 박고 휴대전화 삼매경에 빠진 후배를 불러세워 함께 일을 처리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후배는 뭉그적거리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했다.
답답한 마음에 불러세우길 여러 번. 앞으로 잘해보겠다며 결의에 찬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후배가 있던 팀을 관리하는 장으로 2년 정도 근무했다. 후배는 내가 팀에서 나간 이후에 들어온 친구다. 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지만 떠난 사람은 아는 것도 눈 감아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거짓말로 변명하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었다.
후배가 속한 팀은 현장에서 실측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내가 속해있던 당시의 팀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생팀이었다. 덕분에 업무를 하나하나 헤쳐 나가며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서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엑셀 VBA를 활용하여 평균 3시간이 걸리던 작업시간을 30초로 단축해 그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어느 순간 후배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데이터 정리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업무자동화를 알고 있던 나로서는 후배의 거짓말을 쉽게 웃어넘기기 힘들었다. 참다못한 나는 후배의 거짓말에 한 소리 하고 말았다. 후배는 멋쩍은지 대답을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화도 났지만, 기죽은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표창을 받을 소속 직원을 추천해 달라는 공문이 왔다. 마음 한편 쓴소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일까. 그 후배를 소속장에게 추천하고 공적조서 작성을 요청했다. 아침부터 온종일 공적조서만 붙잡고 있더니 연차를 쓰고 퇴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그 후배를 추천한 내 입을 때리고 싶었지만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너의 표창을 위한 공적 작성이다. 집에 가서라도 마무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 후배는 일단 최대한 써보겠다고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마무리하지 못한 공적조서를 편지로 남기고 퇴근을 해버렸다. 기한이 정해진 후배의 공적조서를 수정하고 있는 내 모습에 현타가 왔다. 엉망인 공적조서를 보냈다가 된서리를 맞을 사람은 담당자인 나였기 때문이다.
후배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까지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본인의 무책임한 행동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순간 좋은 점도 안 보일 가능성이 크다. 상대를 싫어하기 시작하면 미운 것만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인간관계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축적된 결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 후배와 나의 관계를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생각해 보니, 그에 대한 적개심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변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들마저 고깝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수치를 따지는 것은 언뜻 보기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나와 더불어 타인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다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후배를 마냥 이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스트레스는 사라졌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색안경에 색이 빠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하지만 왜곡된 기억은 바뀔 수 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마음 쓰기보다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산에는 잎을 떨구고 기둥만 남은 나무가 꼿꼿이 계절을 보내고 있다. 나무가 줄지어 선 모습은 머리를 빗은 듯 정갈하다. 한 해의 출발점을 겨울에 둔 이유는 본질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내가 후배에게 씌운 프레임을 거두고 본질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