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을 좋아한다. 자잘한 잔뿌리에 까만 흙이 묻어있는 당근을 볼 때면 군침이 흐른다. 찬물에 씻어 아무렇게나 썰어 먹어도 맛있지만, 사과, 키위와 함께 즙을 내어 먹으면 그렇게 달콤하고 상큼할 수가 없다. 눈도 맑아지고, 건강이 금세 좋아질 것만 같다. 최근 또 다른 당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당근마켓이다.
당근마켓은 중고거래 애플리케이션이다. 당근마켓을 이용해 사람들과 물건을 사고팔 수 있다. 첫 거래는 당근 때문이었다. 당근을 사과와 같이 즙으로 만들어 먹고 싶은데 신형 착즙기는 너무 비쌌다. 괜찮은 중고 착즙기를 구하기 위해 시작한 당근마켓은 신세계였다. 일반 중고가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착즙기를 구입한 후에도 당근마켓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청소기, 공기청정기 등 집 안 곳곳이 당근마켓 표 물건들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건 자전거다. 무릎을 다친 후 근력운동과 자유로운 이동도 가능케 하는 자전거는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며칠 당근마켓을 기웃거리다 튼튼한 자전거를 발견했다. 우리 집까지 가져다준다니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한 번 타보고 그대로 쭉 내 것이 되었다.
사실 나는 새것에 익숙하지 않다. 전자기기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나는 몇 번 손을 데다가 방치하기 일 수다. 옷 취향도 한결같아 짙은 색 편한 옷을 즐겨 입는다. 유행에 둔감하다 보니 즐겨 입는 브랜드의 이월상품이 나에게는 딱 맞다. 여동생이 쓰다 만 손때 묻은 패드, 무선키보드를 얻으면 좋아했다. 그게 당연하고 편했다. 어쩌다 입은 새것의 냄새와 뻣뻣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내 힘으로 돈을 벌면서 점점 새것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새 책, 새 옷, 새 신발. 집 떠나 모든 것을 새로 장만하려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냄비 하나를 사도 최소 두세 개를 골라 재질, 성능, 가격 등을 비교해서 사야 하니 머리가 아팠다. 새것을 길들이는 것은 또 어떻고.
엄마는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새것 놔두고 남이 사용한 물건을 사다 쓴다고 타박이었다. 새것과 다름없고 어느 정도 길들어 바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냐고 대꾸했다. 내가 할 고민을 이전 주인들이 대신해 줬으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없다.
사람도 비슷하다. 어느 순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는 과정이 조금 힘이 든다. 전부터 알아 온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하다. 오래되어 해졌지만, 내 몸에 딱 맞는 옷처럼. 겉치레 없이 곁에 있기만 해도 온기가 느껴지고, 서로 잘 알고 있으니 별다른 말 없이도 잘 통한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은 어느덧 20년 지기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익숙한 사람과 물건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매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것을 익혀야만 한다. 가끔은 이러한 새로움이 내 삶에 또 다른 바람을 일으킨다.
그래도.
나만의 시간, 내 공간만큼은 나에게 익숙한 것으로 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