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대나무 향이 확 밀려온다. 저편엔 농묵으로 그린 수묵화가 펼쳐진다. 엄마 손을 잡고 향한 냇가는 별처럼 반짝인다.
엄마는 종종 냇가에 가서 빨래했다. 나는 주로 비누통과 빨랫방망이를 들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가끔 흠칫 놀란 표정을 짓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빨래는 누워서 떡 먹기다. 세탁기에 옷이나 수건을 넣고 돌리고 건조기로 말려주면 끝이다. 이렇게 좋아진 세상인데, 풍속화에서 볼법한 장면이 그리 익숙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동네 빨래터는 골짜기에서 흐른 물이 저수지를 거쳐 내려오는 개울가였다. 수심이 제각기 달랐던 탓에 물빛은 다채로웠다. 계단형으로 된 석축 너머는 아득한 검푸른 색을 띠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뒷짐 지고 우뚝 솟은 대나무는 한층 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활달한 물길 사이로 솟아있는 물풀은 물고기들이 숨기 좋은 은신처였다. 물이 맴도는 곳엔 어린 송사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송사리를 눈에 담으려 얼굴을 박을 기세였는지, 엄마는 빨래하다 말고 바구니로 물을 한 움큼 떠다 주셨다. 햇살 아래, 작은 생명이 두 눈 가득 어려 반짝거렸다.
“고기 잡으러 가자” 학교를 마치면 친구와 함께 족대를 들고 빨래터로 뛰어갔다. 누구 한 명 훌러덩 옷을 벗을 요량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풍덩 몸을 던졌다. 손바닥만 한 피리를 잡은 친구는 그날의 영웅이 됐다.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던 피리가 보석처럼 소중했다. 으슬으슬 몸을 떨기 시작하면 적당한 대나무를 꺾어 낚싯대를 만들었다. 담벼락을 헤집어 구한 지렁이를 매달아 던지기 무섭게 신호가 왔다. '툭툭' 미끼에 입맛을 다시는 붕어의 짜릿한 손맛도, 낚싯대를 끌고 사라져 버린 가물치의 강력함도. 문득 어린 날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풍경이다.
고개를 돌리면 대숲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다. 빽빽한 대나무에 가린 하늘이 성긴 햇발을 뿌리면 대 그림자 사이로 선명한 햇빛 줄기가 땅에 부딪혀 솟았다. 가는 빛을 따라 걸으면 숲속 깊숙이 안긴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노거수 한 그루가 기지개를 켜는 자태로 우뚝 섰다. 일부 형태만 남은 시멘트 벽돌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리는 우리 곁으로 대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대나무가 춤을 췄다. '쏴아아' 시원한 소리는 숲속 깊숙이 오래 울려 번졌다
추억은 서서히 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이 사라진 것처럼 끊긴 채 기억된다. 엄마한테 옛날 냇가에서 빨래했던 기억이 나는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아빠 따라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 그랬지.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 떨기도 좋고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빨래터에 갈 필요가 없었다. 멀쩡한 세탁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의 삶에 깃든 이웃에게 먼저 다가간 엄마 덕분에 이웃들도 곁을 내주었다.
내가 살던 마을 풍경은 왠지 모르게 사람 냄새가 났다. 비록 그 시절은 지금보다 다소 불편했으나, 좁은 집을 나와 이웃끼리 정을 나누곤 했다.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을 나눠 먹고, 옥수수를 한가득 삶아 이웃집에 건네기도 하면서 말이다. 친구들과 좁은 골목길을 급히 내달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마을 어르신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내 자식이 아니라도 누구든 위험한 행동을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다. 까칠해 보이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어르신이 너무나 흔했다.
무르익은 계절은 꽃을 피우고 다시 함박눈을 내려 세상을 덮었다. 봄이든 겨울이든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더 이상 ‘뿔난 어르신’이 보이지 않을 때쯤 빨래터에도 중장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빨래터를 허물어 버리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굴착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한 아이가 빨려 들어가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빨래터는 조금씩, 조금씩 흙탕물로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간은 고개가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했던 대나무를 산책로와 새로 지은 건물로 바꾸었다. 그래도 물길은 그대로라, 졸졸 흐르는 시내를 보고 있으면 빨래터가 떠오른다. 어떤이에겐 애환의 기억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일상이자 휴식의 장소이기도 했다. 풍경은 선명하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득해 다가가려 해도 희미하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춰 시간을 지우고, 긴 시간 동안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흐르는 물에 햇살이 가득해 빛이 샘솟는다. 어린시절의 내가 한 움큼씩 집어 가슴에 묻은 풍경이다. 별안간 이곳에서 뛰놀던 시절이 폭죽처럼 반짝인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그 자체로 나에게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