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챗GPT(언어모델 AI)가 쓴 에세이를 봤다. 어떤 면에서 사람보다 더 낫다. 키워드만 던져두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글을 써준다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다. 적어도 십수 년 전엔 그랬다. 엊그제 계절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학창시절 노트를 발견했다. 어려운 문제를 오려 노트에 붙이고, 종이 한 귀퉁이에 끼적인 오답노트. 절절히 눌러썼으나 전하지 못한 글줄. 노트북이나 패드 없이 기록한 그 시절 마지막 기록물이다.
지금은 패드나 노트북으로 강의를 녹음하고 기록한다. 두꺼운 교재는 OCR(광학문자인식)을 적용한 PDF파일 교안으로 대체됐다. 간단한 글은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 적거나 아이패드에 종이질감 필름을 붙이고 애플펜슬로 글을 쓴다. 사각거리는 느낌이 퍽 사실적이다. 오답노트를 만들기 위해 예쁘게 오려 붙이지 않아도 된다. 원하는 그림을 캡처하여 슥 이동할 수 있다. 자유롭게 확대, 축소도 가능하니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스마트기기가 있기 전에는 집 안 구석구석 흩어져 있던 추억들이 그득했다. 꾹꾹 눌러 담은 편지, 흘려 쓴 일기, 여행지에서 구입했던 엽서, 먼지 쌓인 앨범, 우체국 아저씨를 기다리던 따뜻했던 날의 마음. 보물찾기 하듯 어린 날의 기록이라도 발견하면 하루가 따뜻했다.
바삭한 종이와 차가운 펜의 촉감, 머리와 심장에서 손끝으로 말랑한 뭔가를 밀어내는 감각.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만큼 쓰고, 또 쓰던 날들이 언제부터인가 희미하다. 먼 훗날엔 먼지 쌓인 노트 대신 패드를 발견하고 옛 기억을 떠올릴까. 작동하지 않는 기기 속 추억도 함께 잠들까 미리 걱정이다. 더 늦기 전에 종이와 필기구를 마음껏 놀리기로 계획했다.
특별한 일 없이 걷고, 먹고, 쓰는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그 과정은 넌지시 위로를 건넨다. 마침 펜을 들어 글을 쓰기 좋은 계절이다. 한 손은 종이를 누르고 다른 한 손은 필기구를 쥔다. 잠깐 스마트폰과 패드를 덮어두고 일상에서 흘려보낸 감정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적어 내린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챗GPT 시대,
우리는 여전히 몸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