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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mind Jul 30. 2023

반만큼만

 부모님의 휴대폰을 사려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용법을 알려 달라는 부모님께 짜증을 냈다. 알려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여동생은 내가 어련히 잘 알려줄 것으로 생각하는지 관심이 없다. 직장에서 꾹꾹 눌러 담았던 화가 집에서 폭발한다.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묵묵히 쌓인 시커먼 감정을 배설한다. 그렇게 나는 또 부끄럽고 만다.


 문득 회사 선배들한테는 한없이 친절한 나를 발견한다. 컴퓨터가 고장 나면  바쁜 업무를 제쳐 두고 고쳐주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직접 분해해 가며 문제를 해결한다. 손님이라도 올 요량이면 근처 식당 예약부터 상사의 기호에 맞는 음식을 찾기 바쁘다. 이보다 적극적일 수 없는 나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부모님에겐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면서 짜증을 내고, 정작 회사에서는 미소를 띤 가면을 쓰고 있다.


 마침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들, 바빠? 엑셀 인쇄가 잘 안 되네, 시간 되면 조금 알려줄래?" 혹여나 내 업무에 방해될까 연신 내 눈치를 살핀다. 메일로 받은 파일의 인쇄 영역을 설정하고 메일로 다시 보냈다. 1분도 걸리지 않는 작은 도움에 엄마는 너무 고마워한다. 그 모습에 괜히 또 짜증이 났다.


 엄마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셨다. 아빠가 발령 나는 대로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 했던 상황이라, 나를 키워줄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할머니도 목욕탕 운영으로 바빴고, 큰이모도 멀리 떨어져 있어 나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었다고 했다. 작은할머니가 나를 돌봐주겠다고 했지만, 엄마 본인이 직접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단다. 우리 손을 잡고 이곳저곳 참 많이도 다녀준 엄마 덕분에 어린 시절 사진 앨범을 볼 참이면 하루가 짧다. 한 날은 젊은 날 엄마랑 같은 직장에 있던 친구가 놀러 왔다. 이제 퇴직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중인 듯했다. 엄마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했으면 커리어도 쌓고 돈도 꽤 모았을 텐데. 엄마에게 후회하지 않냐고 물으니 웃으며 말했다. “후회 안 해. 너네 키우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데.”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자식들 키우느라 세월을 다 보냈으면서 즐겁긴 뭐가 즐거울까. 괜히 마음 한이 시리다.


  아빠는 요즘 늦깎이 공부에 맛을 들였다. 최근에는 나무를 키우면서 기사 자격증도 하나 땄다. 내친김에 나무 의사도 준비하려고 나에게 부탁한다. "아들, 인강을 하나 신청했는데 책 주문 좀 해줘." 젊은 날 고집 세고 강단 있던 아빠는 자식이 귀찮다고 투덜대면 허허허 웃기만 한다. 아빠는 둘째 할머니의 막내아들이었다. 집안에선 큰아버지들은 대학을 보내고, 막내는 농사일을 부리려 못살게 굴었지만, 아빠는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는 아들이었다. 갖은 핍박 속에서 기어코 대학교에 들어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집은 지금 살고 있는 곳에 정착했다. 아빠는 마음이 여려 가까이에 있던 어려운 친척,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가족이 우선이던 엄마와의 의견 차이로 두 분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기도 했다. 그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젠 알 수 있다. 당시 아빠, 엄마의 표정에는 많은 고민과 슬픔, 삶의 어려움이 잔뜩 묻어 있었음을. 부모라는 울타리에서 나와 동생은 주인공처럼 자랐지만 정작 본인들은 울 밖에서 외롭고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스무 살 겨울,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히스테리리며 노량진으로 향했다. 물론 엄마, 아빠의 돈으로 호화스럽진 않지만, 풍족한 수험생활을 했다. 나름 저렴한 고시원,  끼당 2천 원짜리 뷔페식 식당을 전전했지만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부족한 것 없는 지원에 나도 내 동생도 자리를 잡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신발장에 놓인 아빠 구두는 앞코가 닳아 가죽색이 바래있었다. 그 지원이 당연한 게 아니란 것을 이젠 알 수 있다.


 삼십 대 후반에 다다른 지금, 세상을 사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어느덧 자립해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내가 잘살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 오랜만에 부모님 얼굴을 보면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회사 선배를 대하는 태도의 반만큼이라도 부모님한테 잘하면 후회를 덜 할 것 같다. 하지만 청개구리 심보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들. 이 문제집도 사줘.” 또 문제집을 사달라는 아빠한테 한 소리 한다. “아빠, 요즘에는 이렇게 공부 안 해. 책만 산다고 공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지켜보던 엄마도 다 보지도 못할 책이 집에 쌓여간다고 맞장구친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한번 사주라는 아빠의 말에 못 이기는 척 책을 주문한다.


 하루하루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던 부모님을 떠올린다. 그렇게 또 위로받고, 그렇게 또 살아간다.


잘하자. 남을 대하는 태도의 반만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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