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고
편지를 좋아한다. 편지를 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답장이 오지 않을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까지도 좋다. 종이 위에서 상대방을 부르고, 말을 걸면서 쓰는 편지에는 마음이 담긴다. 다시 읽어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편지는 방 한구석 몇 박스를 차지한다. 버리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편지’라는 매개에 관한 내 애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가 주고받은 서간문을 엮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오해를 해소하기는커녕 증식시키는 무척 불쾌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이유인즉슨 이슬아 작가의 편지 전반에서 남궁인 작가를 대하는 방식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적하는 방식의 글이 부드럽지 않을뿐더러 왠지 모르게 보는 내가 민망했다. 솔직함과 무례함에는 차이가 있다. 내가 무슨 수로 그 둘 사이의 행간을 읽겠느냐만은 매 편지마다 이슬아 작가의 핀잔과 가르침에 남궁인 작가가 눈치를 보고 변명을 늘어놓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래는 내가 읽으면서 불편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 글을 읽고 저에게 시전 하시려던 것은 “라떼는”이 맞습니다. (중략) 물론 저는 선생님의 대륙횡단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방랑자를 꿈꾸는 모습은 좀 지루해서 안 궁금하지만 친구가 먼 곳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으니까요. 다만 제 글이라 ‘라떼는’이었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모처럼 빛나는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킨 아름다운 글이었는데 고작 ‘라떼는’으로 받아 치시다니. 첫 번째 편지에서의 불호령을 다시 한번 쩌렁쩌렁하게 반복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제 글을 제대로 읽으신 것 맞습니까?
P.107
만남의 주제는 ‘이슬아와 남궁인의 서간문 연재, 이대로 괜찮은가’였습니다. 그 중대한 만남에 선생님은 대지각을 하셨습니다. 무려 한 시간 이십분이나요. 선생님이 바쁘신 건 알지만 저나 이연실 편집자님도 그 못지 않게 바쁩니다. (중략) 선생님이 단톡방에 거듭해서 구구절절 써놓은 사죄 메시지에 편집자님은 너그러운 글투로 천천히 오시라고 두 번이나 답장하셨지만 제 입장은 달랐습니다.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천천히 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각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을 때 저는 한마디 카톡만을 남겼습니다. “여러모로 어리석으시네요.”
P.151
선생님은 말뿐 아니라 글에서도 할 얘기가 늘 많으시죠. 우리의 서간문만 봐도 그렇습니다. 방금 전 출판사에 연락하여 확인해보니 지금까지 저는 187매를, 선생님은 257매를 쓰셨더라고요. 번갈아가면서 편지를 한통씩 써왔는데 분량이 70매나 차이 난다니 …… 아니 도대체 편지를 왜 이렇게 길게 쓰신 겁니까? 2주에 한 번씩 마감 고생을 한 건 똑같은데 선생님께 70매가량의 원고료가 추가로 입금된다고 생각하면 약간 울화통이 터지는군요. 앞으로는 짧고 굵은 편지를 쓰시길 바랍니다.
P.178
선생님은 지난 연인에게 “당신이라는 역사의 지극한 사서”가 되겠다고 맹세하셨는데요. 저는 한때 사서가 꿈이었지만 어떤 연인에게도 “당신이라는 역사의 지극한 사서”가 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저라는 역사의 사서를 자청한다면 “네가 뭔데 감히”라고 말하며 웃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가 문장력만큼이나 갈고닦아야 하는 건 ‘닥침력’일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보다 더 훌륭하게 편찬할 사람들이 또 있을 테니까요.
P.181-183
그나저나 매우 긴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제가 지난 편지에서 닥침의 미덕을 설파했는데 말입니다. 원고지로 무려 45매나 되는 글을 전송하셨기에 정말이지 징그럽게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새삼 생각했습니다. (위의 문장을 포함해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의 챕터 전부)
P.203-216
편지는 지극히 사적이다. 그 사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의도를 가지고 서간문 형태를 취해 글을 썼다면 수신자가 남궁인 작가나 이슬아 작가, 서로가 아닌 독자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남궁인 작가가 되었다가 이슬아 작가가 되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런 편지는 도무지 조금도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 저 글들이 서간문 형태로 쓰이지 않았다면 이만큼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다시 책 표지의 띠지를 보니 어이가 없다. 펀치같은 편지라니. 편지는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편지는 누군가를 탓하고 지적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나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드러내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용도로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쓰고 받았던 편지에는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내용보다는 사랑하고 보듬는 말들이 더 많았다.
편지는 한글을 제대로 못 쓰는 다섯 살 어린이도 어버이날에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글이라고 생각한다. 맞춤법이 틀려도, 횡설수설해도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다.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수백 통의 편지에는 안부를 묻지도 않고 자기 이야기만 냅다 쓰는 편지도 꽤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읽는 시간에 친구를 더 알아가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슬아 작가는 ‘남궁인밖에 모르는 남궁인 선생님께’ 챕터에서 얼만큼 자신이 서간문에 적합한 글을 썼는가 통계를 내었으나 나는 서간문이라는 형태를 준수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편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식을 좀 못 갖추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오만하지 않은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는 편지를 보고 싶다. 오늘 저녁에는 봉인된 박스를 풀어 애정이 가득 담긴 친구들의 편지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