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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Mar 03. 2022

일복 많은 놈들은 똥통에 빠져서도 똥통 벽을 닦는다

드라마 <미생>을 본 건 유행이 지나고도 몇 년이 흐른 뒤였다. <미생>의 연기자들이 TV광고를 차지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에는 첫 회사를 퇴사할 즈음이었다. 취준생의 신분으로는 장그래가 인턴으로 입사 과정을 거치고 회사생활을 하며 자기를 증명해서 살아남는 그 생생한 과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다시 회사에 입사한 후에도 <미생>을 웃으며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계약직의 차별과 한계, 그리고 끝을 마주한 건 장그래뿐만이 아니었다. 원인터내셔널의 영업3팀 못지않게 좋은 사람들과 일했지만, 장그래의 '같은 사람이고 싶다'는 말은 계약직으로 일하는 내내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 단행본으로 『미생』을 다시 봤다. 이제는 불안함보다는 깨달음으로 『미생』의 이야기를 곱씹을만한 시간이 되었다. 햇수로만 직장인 8 . 장그래보다는 김대리나 천과장에게  몰입이 된다. 그간 나는 때로는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번의 이직을 거쳐  번째 회사에 정착했다. 계약 문제로 불안해하지 않는 정규직이고,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팀에서 선임 노릇도 하고 있다.  회사에서 팀장님에게 대들던 신입의 패기는 조금 사라졌지만 여전히 동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텃세를 부리거나 닦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버티는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미생』의 어느 누구도 완생이 아닌 것처럼, 장그래의 시절을 벗어났다고 해서 직장생활에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의 요즘 고민은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내가 1980년대 산업화 시기의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회사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과 긴밀하게 연결되고, 워커홀릭으로서의 성취가 추앙받고, 노력이 결실을 맺는, 가족 같은 회사를 지향하던 그 시절에 회사에 있었다면 정말로 나는 날아다니지 않았을까? 평생직장은 실체가 없어진 지 오래고, 커리어를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가 필수인 시대. 자신에게 득이 될 정도로의 적당한 팀워크와 적당한 배려, 워라밸의 적당한 업무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열심은 순식간에 어리석음이 된다.


열심히 일하면 일하는대로 더 많은 열심을 요구하는 상사. 나에게는 도움을 바라지만 내가 도움을 청할 때는 외면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왜 나는 여전히 회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누군가의 결과물이 엉망이면 내 일이 아니니까 신경 안 쓰면 그만인데, 나는 왜 우리 회사의 결과물이 더 나아지기를 바랄까? 왜 나는 내 고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도 누군가가 더 잘 해낼 수 있도록 돕고, 내가 하는 일만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최고로 잘하고 싶은 걸까? 누군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위로의 말을 건네도 희생은 거부하는, 작은 성과를 크게 부풀리고 내 갈 길을 찾아가는 그런 야무진 사람은 되지 못하는 걸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미생의 한 대목이 마음을 붙잡았다.


『미생』 단행본 2권 (드라마로는 6화)에서는 갑인데 을처럼 소심한 박대리가 나온다. 박대리를 얕잡아본 거래업체는 고의적으로 납품 기한을 지연하는데, 인턴 장그래 앞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박대리는 없던 허세를 부리며 절차대로 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법무팀과 재무팀까지 모인 회의가 열리자 박대리는 다시 불안해한다. 장그래는 모두를 안고 갈 수 없다고, 자기만 생각하라고 조언하지만 끝내 박대라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납품업체와 거래를 끊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물론 그런 일로 거래를 끊을 리 없는 회사 측에서는 ‘박대리는 낭만이 있다’는 말을 하며 절차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훈훈한 마무리. 그렇지만 장그래는 번뜩 정신이 들며 어떤 바둑을 졌을 때보다 처참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다.


그러니까 요즘 시대가 어쩌니, 나는 왜 어리석게 열심인 직장인 재질이니 투덜거리며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인 삶에서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모두 자기만의 바둑을 두는 것이니까. 남들이 보기에 미련해 보여도 아마 나는 타고나기를 내가 소속된 조직과 내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에 몰입하는 사람이라 별 수 없다.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내가 살아갈 방식이다. 자신을 좀먹지 않는 선에서 주어진 자리에 맞게 열심을 내는 삶,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호의, 아무도 결국을 보장하지는 않는 상황에서 다만 내가 속한 곳을 사랑하는 용기.


일복 많은 놈들은 똥통에 빠져서도 똥통 벽을 닦는다.

<미생 Part.2 103수>에서 한석율이 장백기에게 하는 말이다. 한참 낄낄거리다가 내 이야기라는 생각에 웃음은 씁쓸한 미소로 번졌다. 일복도 많고 일 욕심도 많은 나는 오늘도 똥통에 빠져서 똥통 벽을 닦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똥통에 빠져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뭐하겠는가, 벽이라도 닦아야지. 그래, 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새벽 두 시까지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어느새 오늘이 된 내일의 나를 채근해 일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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