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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Mar 09. 2022

"어머니, 제가 바로 그 종북 좌파 빨갱이입니다.’’

남편은 전라도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 땅을 밟은 건 스무 살,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시부모님과 대다수 형님들은 지금도 광주에 살고 계신다. 그래서 명절이면 시댁에 갈 KTX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바짝 긴장해야 한다. 멀기도 멀고 오가는 데 돈도 많이 들지만 나는 시댁이 광주인 것도, 남편이 광주 사람인 것도 좋다. 광주에 빚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광주’하면 무등산 수박이나 한정식, 요즘은 광주형 일자리에서 생산된 캐스퍼 등을 떠올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군사 독재에 반대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 ‘폭동’이라는 오명으로 자행되었던 차별을 생각하면 그 시절을 오롯이 견뎌준 광주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다. 실제로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간호사였던 둘째 형님은 병원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을 마주했고, 시내에서 가방 장사를 하시던 아버님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광주는 결코 정치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 사람들은 선거 때마다 적극적으로 후보를 살폈고, 지지하는 정당을 갈아 치우기도 했다. 그때의 민주화 정신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도시,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호감이 간다. 물론 남편이 광주 사람인 걸 알고 만나진 않았지만, 연애할 때 우연히 그가 가족과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통화하는 것을 듣고는 괜히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시부모님의 정치 성향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때는 2017년 5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채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후 치러지는 선거라 엄청난 관심이 쏠려있었다. 왜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때 시댁에 잠시 내려갔는데 TV에서 정치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머님은 뉴스를 한참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네도 촛불집회 나가고 그랬냐?” 어머님의 묘한 뉘앙스에 나는 못 들은 척했고 남편은 얼버무렸다. 정치 고관여층인 우리 부부는 매일 시사 뉴스를 듣고 TV토론은 꼭 챙겨보고, 정치 이야기도 무척 많이 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거 촛불 다 선동하고 그래서 그런 거라는데…. 너네 이번에 투표할 때 절대 문재인은 뽑지 말어라. 문재인은 종북 좌파 빨갱이라잖냐.” 어머님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머니, 제가 바로 그 종북 좌파 빨갱이입니다’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다행히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버님은 곧이어 공산당 이야기를 하셨다. “잘못하면 우리나라 공산화된다. 니들은 모르겠지만 공산당 그놈들이 아주 나쁜 놈들이다.” 시부모님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셨고, 심지어 광주에서 평생 사셨는데 왜 이런 정치성향을 가지게 되신 걸까? 의문이 들었다. TV에서만 보던 태극기 부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분들이 시부모님이라는 사실에 너무 놀라 아버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님의 이야기는 당신이 10 남짓의 나이였던 1950, 6·25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광주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아무 잘못이 없던 마을 사람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죽어가던 사람들은 어떠했는지 설명하는 아버님의 눈은 순식간에 그때로 돌아갔다. 전쟁의 트라우마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부모님의 전신을 휘감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눈앞에 펼쳐진 전쟁의 충격과 ‘공산당’이라는 단어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좌파, 빨갱이에 담긴 공포스러운 기억 때문에 시부모님은 늘 정치적으로 보수정당을 선택하셨으리라. 물론 ‘단독’과 ‘속보’를 매번 달고 나오는 TV조선과 채널A의 뉴스도 한몫했겠지만. 광주라는 진보의 텃밭에서 시부모님은 외로운 싸움을 해오셨던 것이다.


그동안 공산당 이야기를 한참 뒤떨어진 시대정신으로만 치부하던 나는 시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태극기 부대의 그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전쟁의 공포를 어떻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당사자의 고통을 제삼자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더더욱 시부모님의 ‘종북 좌파 빨갱이’ 이야기를 웃어 넘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나와 남편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포를 조장해 정치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식의 선거 운동과 프레임에 더 화가 났다. 물론 시부모님 앞에서는 아무 티도 내지 않았고, 그 후에도 내가 먼저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알고 보니 형님과 아주버님들은 진보적인 성향이라 시댁에서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었다.


5년이 흘렀고,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다. 이번 설에도 아버님은 왜 2번을 찍어야 하는지 한참 말씀하셨다. 공산당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시부모님의 정치 이야기에 제법 능숙해져서 빠르게 대화를 전환했다. TV도 가능하면 뉴스보다는 트로트 가수들이 나오는 방송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이재명 찍을 거면 투표하지 말어라”라고 신신당부하셨던 그 대선이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아버님께 말씀드렸던 것과는 반대로 사전투표를 했다. 곧 본 투표가 시작되고, 출구조사와 개표방송이 진행되면서 하루 새에 국민의 절반은 크게 기뻐하고 또 절반은 크게 실망할 것이다.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의 희비도 엇갈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간절한 마음은 한편에 고이 두고, 나와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미리 마음먹는다. 당장은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철천지원수처럼 보이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시부모님과 대화했던 것처럼, 정치 성향이 달라도 귀를 막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멈추지 않고 보완하고, 고쳐나가다 보면 선택의 결과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질 거라고 희망해본다.


퇴보하지 않는 진보를 바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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