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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광주 5·18, 담론의 경합

─2021년 5월 19일광주 여행후기


   518을 맞이해 짝꿍이랑 갑작스럽게 광주 기행을 계획했다. 짝꿍은 오래전 두 번 정도 다녀온 경험이 있었지만, 나는 광주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나에게 더욱 새롭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광주 기행 일정을 무박으로 짰고, 구체적은 일정은 망월묘역→5·18 민주묘지→5·18 광장→상무관→옛 전남도청→별관(노먼 소프 사진전)→전일빌딩→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었다. 각각의 장소에서 관람했던 전시들은 1980년 5·18~5·27 열흘 동안의 사건 경과, 오늘날까지의 역사정의 세우기 투쟁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과 테마는 모두 달랐다. 각각의 전시가 겹치지 않아서 지루하지 않았고, 열흘간의 항쟁의 내용이 이렇게 다양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여행 일정의 순서에 따라 서술을 전개하면서 곳곳의 전시의 특징을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고, 기행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광주 5·18 담론의 변화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제1부 여행기

1. 망월묘역

   일명 구묘역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80년 5·18 당시 희생자들의 사체를 수습하여 묻었던 곳이다. 망월묘역 전체는 공영 묘역인데, 3 묘역은 당시 희생자들이 집중적으로 묻혀있는 곳이다. 이 곳에는 당시 사망했던 열사들 외에도 광주에 적을 둔 노동운동가들, 농민운동, 역사 정의를 세우기 위해 투쟁했던 운동자들까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망월 묘역에는 해설 서비스가 있어서 이용할 수 있는데, 이 서비스가 다른 국립묘지와는 확연히 다른 이곳 만의 특색 요소이다. 곳곳의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설명해주는데, 예컨대 이런 것들이 있다. 유영봉안소에 대한 설명, 전두환 부부가 광주 근교에 여행 왔다가 여행기념 비석을 세우고 간 것을 시민들이 가지고 와 방문객들의 발굽에 짓이겨지도록 3 묘역 입구에 설치해둔 것, 영화〈택시운전사〉의 외신기자 역할의 실제 모델이었던 위르겐 힌츠 페터의 돌무덤, 노동열사들의 묘지와 그들의 위업을 설명해주는 안내판과 설명 등. 이곳은 80년의 광주와 오늘날까지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역사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이었고, 방문객들이 지난 그 시간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다. 묘역 한편에 걸려있는 5·18 문학 수상작들 역시 볼거리를 제공한다.



2. 518 민주묘지

   신묘역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1997년부터 운영되어 망월묘역에 안장되어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이장한 곳이다. 이곳은 묘역의 설계에서부터 시민의 역사적 승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묘역의 건축 구성 자체가 그러하다. 왕릉의 형태를 닮아있는 신묘역은 배산임수 구조에서부터 묘역 진입 구조에 홍살문, 민주광장, 그리고 묘지를 지키는 십이지신상들 등의 구성으로 이는 5·18을 둘러싼 싸움에서 "민주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시민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다. 폭도로 규정되어 구묘역에 묻힌 수많은 시신들은 묘를 헤집어놓으려 하는 군부정권에 맞서 끝까지 지켜내고, 군부정권의 몰락과 함께 신묘역으로 이전하여 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신묘역은 1997년 이후 5·18 담론에서 승리한 시민의 전리품인 셈이다.  

   묘역의 측면에 위치한 전시관은 열흘 동안의 항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곳의 전시 중 가장 압권인 것은 천장에 위치한 스피커인데, 관람자가 열흘 동안, 시간별 광주 항쟁의 기록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당시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는 오디오를 틀어주고 있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지금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27일 가두방송이 머리 위에서 들릴 때, 마치 관람자는 80년 5월 27일 아침 광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방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전시의 연출 방식 외에도 흥미로운 전시내용을 한 가지 꼽아보자면, 당시 시민들의 일기다. 여고생, 주부, 우체부, 초등학생 등 다양한 시민들의 일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각각의 일기는 다른 필체로 쓰였으나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각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40년 전의 광주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40년 전의 광주로 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네 권, 다섯 권 정도의 일기 내용을 읽기 위해 모든 관람객들이 허리를 숙이고 일기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가장 안 쪽에 전시되어 있던 초등학생의 일기는 26일과 27일을 각각 기록하고 있는데 26일의 일기 내용과 27일의 일기 내용은 전혀 달랐다. 광주 시민을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게 했던 26일의 기록은 27일이 되자마자 마치 학교 과제를 했던 내용을 서술하면서 그 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27일 광주 시민의 패전 이후 군에 의해 진압된 도시에서의 분위기가 마치 침묵에 젖은 듯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곳 묘역은 광주 기행을 다녀온다면, 꼭 여행 일정의 첫 번째 코스로 다녀오라고 권하고 싶다. 서사의 기본 줄기가 되는 열흘간의 항쟁의 내용을 가장 기초적으로 그리고 있는 곳이다. 사건의 발생과 전개,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다짐, 그리고 끝내 시민의 승리를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개될 장소들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하고, 특수한 담론들이 전개되기 때문에 이곳을 우선 다녀오라고 권하고 싶다. 


3. 전남도청

   옛 전남도청이 위치한 이곳은 518 광장~별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5·18을 맞이하여 광장에서는 각 미술작가들에 의해 재현된 그림들이 전시되고, 한쪽 구역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추어 율동을 하는 플래시몹이 이어지고 있었다. 광장의 전시물들은 단순히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에서부터 5·18을 지금의 미얀마와 연결 짓는 것, 근대 한국의 친일인사들을 미술작품에서의 단죄하는 민족주의 담론 등 다양한 담론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곳이었다. 광장에 서술되고 있던 담론들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여 그림으로 그려보기가 쉽지가 않다. 다만, 차이를 가를 수 있는 기준 두 가지를 꼽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시 시민들을 "희생자"로 규정하는 수동적인 객체의 상으로 그리느냐, 반대로 폭압적 정권에 맞서 무장하여 지역을 수비하고자 한 적극적인 주체로 그리느냐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5·18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규정인데, 이를 "자유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해석하느냐 아니면 그 반대로 계급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역사로 그리느냐로 갈릴 수 있다. 이는 광주 5·18을 다른 역사적 사건들 혹은 현재의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 짓느냐를 둘러싸고 흥미로운 짜임새를 보여준다. 담론 지도 그리기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룰 예정이므로 계속해서 나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겠다.

   옛 전남도청은 26-27까지 무장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장소다. 전남도청 본관 1층에는 당시 격전지로서의 도청을 느낄 수 있는 총탄 자국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옛 전남도청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 총탄 자국들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전남도청 별관의 노먼 소프 사진전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노먼 소프 사진전은 최초로 공개되는 것으로서 미국 외신 기자인 노먼 소프가 5/23부터 마지막 항쟁일이었던 5/27까지 나흘간 광주를 촬영한 사진들이다. 노먼 소프 사진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7일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전남 도청의 내부 모습과 시민군의 최후였다. 소프는 아홉 구의 사체와 신원 불명의 사체 한구, 총 열 구의 사체를 촬영했다. 소프가 기록한 사진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 시민군은 초라함을 감추지 못했다. 

   2층에서 열리는 사진전을 보고 1층으로 내려와 유족 및 생존자의 구술로 듣는 광주 이야기에 참석했다. 유족 및 생존자의 이야기는 소프의 사진의 표현하는 초라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5·18은 80년에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진상규명의 요구와 함께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오늘날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사실 당시의 참혹함보다는 지금까지 이어진 그들의 싸움이 내용의 절반 이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프의 사진이 주는 참혹함, 초라함의 인상은 1층에서 구술을 통해 극복되는 셈이다. 아쉬움이라면, 1층 행사를 2층 전시를 위한 대기장소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2층의 관람객들이 1층의 행사에 참여하도록 유도되지 않았다는 것,  1층 행사장의 어수선함이라는 진행 측의 미숙함이었다. 1층의 행사는 2층의 전시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4. 전일빌딩

   도청 별관을 나와 우리의 발걸음은 도청 앞 전일빌딩으로 향했다. 전일빌딩은 80년 당시 광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헬기 사격의 증거물이 보관된 곳이다. 총탄 자국이 무성한 이곳은 현재 역사수정주의의 사실 왜곡에 대한 반론 그 자체이다. 최근까지 계엄군의 헬기 사격은 역사 수정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부정되다가 2017년 확인 작업을 거쳐 헬기 사격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로 채택되었다. 그래서 이곳 전일빌딩에서 이루어지는 전시의 핵심은 사실 왜곡과 가짜 뉴스에 대한 반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1997년 이후 비로소 전 사회적으로 인정된 광주항쟁은 아직까지도 질 낮은 역사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주된 공격 방식은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계엄군에 의한 시민 학살이나 폭행 등을 부정하고, 시민군을 간첩으로 매도하면서 피해규모를 축소시키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수정주의는 결국 "계엄군에 의해 광주 시민들이 공격을 받았고,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과 군부에 저항하였다."는 명제를 전면 부정해버린다. 그들은 군부의 공격을 부정한 채,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하고, 광주 시민을 하나로 명명하기를 거부하며 무장 시민군을 간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계엄군-시민'의 대립 구도를 '자유주의군-빨갱이'로 바꿔버린다.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의 거짓됨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자료를 찾아냄으로써 그들의 명제를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수정주의의 정치는 명제의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 해서 자연스레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담론의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거짓된 주장은 역사에 대한 사실성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반공주의의 공포를 이용한 복권을 꿈꾸는 것이다. 주장의 사실판단이 완료된 현재에 역사수정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작동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반공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전일빌딩의 전시를 관람하고는 굉장히 놀랐다. 앞선 두 곳, 묘역과 도청의 전시와는 그 내용이 중복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지 않아서 지루하지 않았고, 스크린, 모형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활용하여 헬기 사격 사실을 다루면서 시각적으로 훌륭한 연출 방식이 관람객의 집중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전일빌딩과 관련하여 정보가 거의 없었던 우리 두 사람은 전일빌딩을 그냥 지나쳤다면 후회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5.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전일빌딩을 나와 3분 정도 걸어가면 민주화운동 기록관이 나온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던 만큼, 우리는 상당히 지쳐있었고, 시간에 쫓겨 관람을 완독 해야 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곳이다. 이 곳 전시의 특색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1층에서는 대안언론으로 발행했던 《투사회보》(이하 '회보')를 다룬다. 5·18의 역사 중 흥미로운 한 가지는 광주 MBC와 광주 KBS 방화사건인데, 이는 사실을 왜곡하고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가는 군부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응징이었다. 관변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대안 언론을 제작하고 배포하는데, 《회보》는 그중 하나이다. 녹두서점과 YWCA는 《회보》제작되고 배포되던 거점이었다. 

《회보》의 목표와 역할이 광주 민중의 저항운동을 하나로 규합하고,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5·18은 단순히 계엄군의 공격에 대한 광주 민중의 즉각적 저항이라고만 규정하는 것이 이러한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회보》는  짧은 기간 동안만 발행되었고, 광주의 특수한 상황(계엄군의 공격과 학살) 때문에 운동의 방향성을 멀리까지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시민군의 질서를 유지하고, 타협이 아닌 무장투쟁을 '최규하 정부 사퇴'라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할 것임을 적시하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는 운동의 목표를 뚜렷이 하고 있다. 

   2층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시는 단연코 "여성활동" 전시실이라 말하겠다. 이 곳은 사실 앞으로 계속 확장되어야 할 곳이다. 피해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성을 저항 주체로 그리는 담론은 최근에서야 많이 생산되고 있다. 이 곳 전시실에서는 식량보급을 도맡아 하던 중년의 여성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광주 항쟁 당시 여성들의 활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후방에는 보급선을 담당하고 수습한 시민들의 시체를 닦는 '아주머니들' 말고도 헌혈에 적극 동참하던 '황금동 여성들'(황금동은 유흥업소 밀집장소로 황금동 여성들이란 이곳 술집에서 일했던 성노동자들을 일컫는다.)이 있었고, 전방에는 선동자 역할과 무장투쟁을 하여 운동을 이끌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1970-80년 당시 전남에서도 노동운동의 주체였던 여공들은 야학 활 동을 통해 5·18 당시《회보》의 발행과 배포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무장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여성 노동자들 외에도 광주지역의 여성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송백회' 역시 적극적으로 실무를 담당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갔던 주체 중 하나였다. 27일 이후 광주를 지켜온 활동에서도 여성들의 행위는 두드러진다. 군부는 이후에도 망월 묘역에 안장된 시신을 파헤쳐 광주 시민들의 규합을 막고자 하였지만, 유가족 여성들을 중심으로 광주 시민들은 밤낮으로 묘를 지켰다.  

   여성활동 전시실은 사실 규모가 작고, 다양한 여성의 활동을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계속 생산되는 연구들과 발굴되는 여성 활동 자료를 바탕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거라 본다. 


6. 스탬프 투어

   우리는 광주 북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다니며 곳곳 사적지의 도장을 역사탐방 여권에 모았다. 여권에 안내된 사적지 중 우리는 다섯 곳만을 방문했는데, 이건 순전히 무박 여행자의 시간 부족 때문이었다. 서구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은 방문하지 못했다. 자유공원은 27일 진압 이후 항쟁 시민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군사재판은 생존자들에 대한 낙인과 타자화가 시작된 시점이자, 광주 민중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이 촉발된 기점이라 할 수 있다. 군사재판에서 폭도로 규정된 생존자들은 이전과는 같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꾸준한 생계활동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가 도청 별관 1층에서 마주한 유족은 자녀가 계엄군과 맞서다 죽고, 폭도로 규정된 일련의 부정의를 보면서 낙인을 벗고, 진상규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5·18 자유공원은 노먼 소프의 사진 속에서 보았던 열사들의 초라한 최후의 모습이 생존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열쇠이다. 다음에 광주를 다시 방문하면, 꼭 이곳을 찾아 여권을 완성하리라.




제2부 담론의 경합, 광주

─담론의 지도 그리기

   이제, 내가 광주를 돌아다니며 목격했던 여러 가지 담론을 분류해보겠다. 5·18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담론들이 공존한다. 5·18 광장은 이들 담론들이 다양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 지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래서 여행기에 이어 2부에서는 광장과 전시실에서 마주한 담론들을 분류하고 지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담론의 분류 기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한 가지는 당시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나누었다. 양 극단에는 계엄군에게 '당한' 모습을 중심으로 그리는 방식과 계엄군과 맞서 끝까지 싸운 저항적 행위들을 중심으로 그리는 방식이 위치한다. 두 가지 이미지 모두 사실을 훼손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5·18 당시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모두 공존했지만 어떤 이미지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나는 '수동적 객체상'과 '능동적 주체상'으로 양 극단을 표시하고 이를 스펙트럼으로 인식하였다.

   다른 기준은 5·18을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주류의 담론은 5·18을 3·15-4·19-부마항쟁-5·18-87년 6월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5·18을 하나의 '민주화 운동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민주화'란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에서의 민주화로, 독재에서 민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주류의 담론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해석들도 존재하는데, 예컨대 광장에 전시된 이상호의 작품 〈일제를 빚낸 사람들〉이나 손호철의 「5·18 광주 민중항쟁의 재조명」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김정한의『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출판 기념 인터뷰도 주류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내가 광장에서 목격한 다양한 담론들과 손호철, 김정한과 같은 학계 내의 담론들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나누어 지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1. 수동적 객체로서 "광주사태"

   518을 "광주사태"로 명명하거나, 희생자들을 위주로 전시할 경우, 이것은 당시 시민들을 "수동적 객체"의 상으로 그리게 된다. 먼저 "수동적 객체"로 그리는 담론을 논해보자. 광주 사태는 광주 소요 사태의 준말이기도 한데, 소요 사태라는 낱말 자체는 공공질서의 파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 항쟁"이나 "폭도"와 같은 말보다는 객관적일 수 있지만, 이 사건의 인과 관계나 의미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한 편, "광주 사태"라는 규정과는 정서상으로는 다르지만 광장에 내걸린 미술작품 가운데 광주 민중들의 애환과 슬픔을 표현한 여러 미술작품들 역시 부분집합을 구성한다. 이 경우 계엄군의 지나친 폭력성과 잔혹함과 시민의 순결성을 대비시키며 특정한 정서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대체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근대사, 슬픈 과거에 대한 감정을 이끌어내지만, 이는 전시가 끝난 후 쉽게 사라진다. 과거로부터 벗어난 현재는 군부 독재도, 특정한 도시의 고립도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슬픔이라는 정서와 특정한 정권 및 인물에 대한 분노를 전시 관람과 함께 소모할 뿐이다. 이와 같은 감정적 소모의 방식은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월호"를 하나의 불행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슬픔만을 대중적으로 소비하는 경우나 식민지 시기 위안부라는 성노예제를 경험한 여성들에 대한 감정적 연대, 강남역 사건을 일개의 사고로 간주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담론을 내면화한 경우, 매 해마다 돌아오는 추모일과 문학작품으로 재현된 슬픔과 분노는 특정 대상만을 향하고, 개인적으로 소모할 뿐, 이는 어떤 사회적 행위로도 이어지기 힘들다. 

   여담으로 여기에는 지만원 등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은 배제하고자 한다.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은 애초에 군의 학살 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이는 평가와 해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라 사건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부정이다그러나 내가 목격한 광장의 여러 담론들, 그리고 학계 내의 비판적 담론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 혹은 해석이므로 역사 수정주의는 여기에서 다룰 수 없다. 


2. 능동적 주체로서 운동과 항쟁

    반면 5·18을 항쟁이라 표현하고, 시민들의 무장 투쟁 등 항거 중심의 서사를 이어나갈 경우 이는 시민들을 주체로 여기고, 그리고 폭압 정권에 맞서는 그들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시하게 된다. 이 담론은 여러 가지로 변용이 가능하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민중의 항쟁"이다. 5·18을 민중 항쟁으로 묘사하게 될 경우, 군부 혹은 정권의 공격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이는 시민 혹은 민중을 주체로 그리게 된다. 다만 민중이라는 용어는 명확한 개념이라기보다는 "권력자", "통치자", 혹은 "지배층"과 구별되는 개체들을 일컫는 반대 개념이므로 이들의 목적성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로, 광주의 항쟁은 뚜렷한 사회적 요구를 명시하여 시작된 행위가 아니라 계엄군의 공격에 맞서 즉각적으로 저항한 것이므로 5월 광주의 전쟁은 저항주체들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한 편, 내가 광장에서 목격했던 담론들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담론은 "애국 수호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전남도청 앞에 1997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5·18 당시 시민들의 무장항쟁을 "애국 수호"의 목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애국"이 무엇인가를 두고 계엄군과 광주 시민을 구별할 수 있을까? 계엄군의 담론, 즉 간첩의 남파, 그리고 광주 시민의 폭도로 규정했던 논리 역시 반공주의 논리에서의 "애국 수호 활동"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광주에 간첩이 파견되었다는 첩보를 들었건, 그들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된 선동을 했든 간에 계엄군으로서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개별 군인들은 반공주의 논리에서의 "애국 수호 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담론 내에서는 무엇이 참된 "애국 수호"인가를 따져 묻게 되고, 둘 중 하나의 입장은 거짓이 되는 구조를 하고 있다. 계엄군과 반대의 입장에서 "애국 수호"를 하는 이들 역시 무고한 시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폭압적인 군에 맞서 싸운다는 목적을 가지게 되므로 이 역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3.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애국 수호 활동"과 더불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담론은 광장 한편의 "민주광장 예술법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호의 〈일제를 빛낸 사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상호의 작품은 미술로 친일 인사들을 단죄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해당 작품의 양 옆에는 5·18 당시 허화평, 전두환 등 계엄군으로 시민을 학살한 이들과 지만원 등 사실을 왜곡하고 생존자들을 모함하는 이들을 풍자하는 캐리커쳐가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에는 강력한 저항적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담론에서는 지배층이 친일-군부로 이어지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중앙의 작품과 양 쪽의 여러 작품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박정희다. 민중과 괴리된 지배층의 친일 행위가 정부 수립 이후 지배층으로 그대로 이어져 결국 민중을 배반하고 민중을 학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 전시의 서사 내용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시는 가장 조악한 형태로 대중의 정서를 자극한다. 이는 세련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단순하다. 민중과 지배층의 괴리를 표현한 것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이 그림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조악하다. 우선 첫째로, 연출의 조악함이다. 양 옆에 붙은 캐리커쳐들은 당시 학살의 주동자들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을 비열하고 옹졸하게 그려두었다. 특히 일부 그림은 권력자에게 아부를 떠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섹스어필하는 듯한 포즈의 여성으로 그려두거나 또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포즈와 옷차림으로 표현한 것도 있다. 수동적이고, 멍청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들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러한 연출 방식은 악인과 대비되는 영웅의 이미지는 남성성으로 표상되는 몸의 이미지와 포즈 등을 즐겨 활용한다는 것과 대비된다. 더불어 이러한 형태의 연출 방식은 이명박근혜에 대한 일부 비판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보이는데, 이명박을 쥐로 묘사한다거나 박근혜를 희대의 "썅년"으로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결국 이러한 방식의 묘사는 특정 인물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 외에는 효과가 없다.

   둘째로, 셋째, 인물 위주의 역사인식의 문제점이다. 박영효, 김활란, 박정희 등의 다면적인 인물들을 악인으로 묘사할 뿐, 그들의 행위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박영효는 근대화 국면~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인물이었다. 언론사를 창간하고 방직공장을 세우는 등 그의 행위는 "친일"보다는 피식민지의 민족 자본가(?)의 면모에 더 들어맞다. 김활란 역시 태평양 전쟁을 옹호하고 참전을 고무한 행적이 있으나 대중 계몽 활동과 여성 교육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을 단순히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식민지배~발전국가, 그리고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 국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복합적인 장소로서 남한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든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이러한 관점의 한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집권 전 박정희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는 분명 식민지 조선에서 출세를 목적으로 만주 군으로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한 인물이다. 독립 이후 남한에서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남한을 나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다져진 남한의 산업의 기반과 국가 주도 개발은 빠른 속도로 경제를 성장시킨 비결이었으며, 전후 농촌 사회를 빠르게 복구하고, 전 사회적으로 근면성실이라는 도덕을 형성한 효과가 대단했다. 때문에 식민지 시기 다카키 마사오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인물의 비열함을 드러내는 것은 후자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인물을 신화화하는 입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셋째, 세계관이 단순하다. 일제 vs 조선 민중 ─ 군부독재 vs민중으로 이어지는 대립구도는 식민지 시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은닉하며, 민중의 다양한 투쟁 상의 요구와 투쟁의 성격을 소거해버린다. 더불어 현재의 갈등을 설명하지 못한다. 독재가 끝이 난 지금은 어떤 대립구도가 관찰되는가?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와 군부 독재의 잔재로만 지금을 설명할 뿐, 과거와는 사뭇 다른 현재의 갈등 양상을 설명하는 모델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담론은 현재성이 떨어지고, 5·18의 의미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광장에 전시된 그림 속에 골자를 이루고 있는 이 담론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설명 틀로서 매력적이지 못하다.


4. 민주화 운동과 시민의 승리  

   한편, 현재 가장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담론은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사태' 담론을 무너뜨리고 가장 권위 있는 담론이 된 '민주화운동' 담론은 5·18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3·15 - 4·19 - 부마항쟁 - 5·18 - 87년 6월 항쟁 - 국민의 정부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탈독재-자유 민주주의화 과정으로 본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 5·18을 위치시키는 방식은 제도 교육을 통해 일반적 담론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5·18을 기나긴 민주화 운동의 과정 속에 위치시키게 되면, 27일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도청 내 시민군의 패배는 결코 역사적 실패가 아니게 된다. 결국, 87년과 민선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민주화 운동에서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담론은 매우 세련된 형태로 현재의 시민사회의 승리를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신묘역의 전시관과 노먼 소프 사진전 역시 민주화 담론을 중심으로 하여 시민 승리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민주화"로 이름붙여진 탓에 이 담론에서 주체가 되는 "시민"에는 주목이 덜 따르지만, 여기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계엄군에 맞서 싸운 광주 인민들은 스스로를 "시민" 또는 "시민군"으로 표현했다는 점, 전선의 구도가 비계급적이라는 점 등에서 5·18의 성격을 시민항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담론 역시 여러 한계에 부딪히는데, 몇 가지를 꼽아보자. 

   우선 5·18의 발생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광주가 공격 장소로 선택되었는지, 왜 군부가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의 학살을 계획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전두환의 권력에 대한 탐욕, 군부의 집권을 막지 못한 역사적 실수로서 '서울역 회군' 정도를 제시할 뿐이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 실패한 이 담론은 결국 민족주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학살의 책임자들을 절대적 악으로 표현한다. 5·18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함과 포악성은 이와 같은 표현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개인의 비이성적 행위가 사태의 발생원인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둘째, 비(非)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행보를 포용할 수 없다. 여기에서 시민은 부르주아(burgeois)보다는 시투아앵(citoyen)에 가까우며, 정치적 권력 주체로서의 시민, 그리고 정상 규범을 내면화한 주체로서의 시민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자료와 연구들에서 비(非)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하나둘씩 드러나게 되면서 "시민항쟁"의 타당성이 의심받게 된다. 2019년 개봉된 강상우 감독의 영화 「김군」과 박정훈의 기고문 "인자, 진, 아방궁... 5.18 숨은 주역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는 비 시민들의 5·18의 적극적 참여자로서 비 시민들을 조명한다. 따라서 김정한의 지적과 같이 시민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담론 속에서는 어떤 주체들은 잊히고 만다(참고: 김정한 교수 인터뷰). 

   셋째, 민주화 운동의 승리 사관에서는 정치적 민주화 외의 반자본주의적 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역사는 사라지고 만다. 5·18은 계급적 성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5·18 직전의 한국 사회는 YH여공들의 투쟁이나 사북항쟁 등 10·26 유신 붕괴 이후의 노동투쟁들이 봇물 터지듯 한국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착취구조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급진적인 분위기였다. 5·18은 이러한 분위기를 단숨에 침묵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승리 사관 속에서는 민주화 세력의 승리라는 결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한국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5·18의 의미는 축소되기 쉽다.


5. 한국 자본주의 위기와 5·18

   518의 발생 배경을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반공주의의 보루로서의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담론도 존재한다. 광장과 전시의 서사 속에는 이 담론의 관점은 거의 전적으로 배격되어 있었다. 518을 특히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담론의 제공자들은 사건의 발생 배경으로서 정치경제학적 조건을 설명하고자 하는 담론에 대해 탐탁지 않아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정치경제학적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 국가의 폭력적 행위와 시민의 저항적 행위를 흐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여기에 대한 해석은 순전히 개인적 경험에서 얻은 인상이다). 그러한 비판이 타당한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담론만이 거의 유일하게 5·18의 경제적 측면의 분석을 제공한다.

   손호철은 “‘5·18 광주 민주항쟁’의 재조명”에서 광주사태의 발생원인을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그는 5·18을 유신 체제가 붕괴된 10·26 이후의 정치경제학적 변화들을 중심으로 설명을 전개하고 있는데, 70년대 후반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반자본주의 운동의 미성숙과 중간계층의 미형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중심으로 민중의 실패와 신군부 세력의 득세를 설명하고 있다. 각각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6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은 외자와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주도 전략이었는데 이것이 70년대 말에 이르러 석유파동을 계기로 재생산의 위기를 맞게 된다. 10·26은 지배세력 내부의 분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그러한 사회분위기를 제공한 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따른 유신독재에 대한 민중의 불신이라 볼 수 있다. 10·26 이후 붕괴된 지배질서 속에서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북항쟁 등 정치적 민주화 운동에 포섭되지 않는 노동운동과 부마항쟁 등 시민운동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공급되던 외국 자본의 투자가 감소하였고,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으로 자본을 공급하고 안정적으로 이윤을 창출할 필요성, 즉 새로운 독재자의 등장이 자본의 입장에서 요구되었던 것이다. 

   한 편, YH 투쟁이나 사북 항쟁 등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기점이 되었던 투쟁들이 있었지만, 그 힘이 미약했고, 조합주의적 수준을 넘지 못했으며, 87년의 6월 항쟁과 비교하여 볼 때, 중간계층이 군부 독재의 청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행은 실패에 가까워졌다. 더불어 '서울역 회군'으로 일컬어지는 민주화 세력의 전략 상의 실패는 군부에 의한 학살이 지역적인 수준에서 자행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손호철의 분석은 5·18 광주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군의 이동을 승인하였으며, 유사시에 항공모함을 투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이와 같은 개입은 10·26 이후의 곳곳에서 일어난 노동 쟁의와 불안정한 사회분위기를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진압하고, 한국 사회에 투자된 자본의 안정적인 축적을 도모하기 위한 개입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손호철의 분석 역시 왜 하필이면 광주가 선택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두 가지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해 볼 뿐이다. 거의 모든 담론에서 "왜 광주인가"가 설명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진상규명 작업이 미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각각의 담론은 5·18 광주를 군부의 폭력적 행위를 강조하느냐, 민중의 저항적 행위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스펙트럼 속에서 위치시킬 수 있고, 5·18을 무엇과 연결시키는지 혹은 어떻게 의미화하는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어느 하나가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여행을 하면서 마주한 각각의 다른 담론들의 산재, 주류 담론의 전환, 그리고 그곳의 기억으로 자리잡지 못한 어떤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광주는 담론의 격전지이다. 그리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주류 담론의 서사가 흐르는 곳이다. 세심한 연출과 전시의 서사구조는 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와 자료 발굴이 수행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담론의 전환을 위해 고군분투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이 글은 담론의 격전지로서 광주를, 다양한 담론이 공존하는 지형으로서 5·18 민주광장의 풍경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광주를 아직 가지 않은 사람이라면, 5·18 스탬프 투어를 완료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꼭 5·18 기간에 이곳을 가보기를 적극 권장한다. 내가 목격한 것과 같은 풍경, 또는 내가 목격한 풍경 이상의 것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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