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착취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나
이 글은 지난 5월에 번역 출간된 『중산층은 없다─사회이동이 우리를 어떻게 호도하는가』(원제: We Have Never Been Middle Class: How Social Mobility Misleads Us)에 대한 소개글이다. 나는 이 책의 공동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이 책은 나의 첫 번역서이므로 애틋한 감정이 투영된 책이다. 이 글에서는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의 글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현재성에 관하여 나름의 분석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중산층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와 용례에 관한 모든 학술적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중산층이라는 개념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가 부정하는 것은 중산층의 객관적인 실재성이다. '중산층'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분석상의 편의를 위한, 혹은 특정한 분석의 목적을 위해 연구자가 임의로 규정하거나 분류하는 것을 넘어서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중산층의 구성원을 분류하는 여러 가지 기준을 소개하면서 판단의 지표가 될 만한 객관적인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였다(16-19쪽).
저자의 연구 문제는 중산층을 분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다면, 왜 사람들은 중산층이 되기를 지향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믿고 행동하는가이다. 저자는 이러한 믿음이 이데올로기에서 기반한 것이라고 보았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투자 주도적 자기결정(investment driven self-determination)'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그릇된 믿음이다. 때문에 저자는 실재를 왜곡하는 이데올로기와 실제의 현실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얻는다. 따라서 이 책의 구성은 이중의 임무를 작가 나름대로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이 책의 내용 구성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문에서는 자신의 연구 문제를 밝히고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밝히는 인류학적 연구방법의 적절성을 설명했다면, 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본격적으로 분석을 전개한다.
1장에서는 중산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지는 장소로서 실재 세계, 즉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재생산 과정을 설명한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 하락할 수도, 상승할 수도 있는 것이 계급임을 암시하는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적극적으로 이 게임이 참여하도록 고무한다. 그렇다면 그 호명 방식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면, 사회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더 높은 생산력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수록 자본의 축적이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적 동학은 축적이라는 일종의 목표를 가지고 작동하므로 사회가 적극적으로 여기에 가담할수록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잉여가 이윤으로 축적된다.
한 편, 잉여는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일하고 받는 임금은 언제나 그가 생산에 기여한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준인데, 이는 임금의 실체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자와 가족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에서 당장의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수준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임금의 액수보다 더 많이 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은 사회의 경제가 얼마나 더디든 간에 성장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착취 관계를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면서 노동자들이 자신을 착취하는 이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소득, 물질적 형태의 자산과 사회관계, 기술 등 비물질적 형태의 자산 등은 불안정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손안에 넣고자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안정적인 노후 생활을 위해서나 또는 번듯한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을 얻고자 한다. 우리의 목표는 안정적인 생활이다. 그러나 이것이 ‘투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착취를 통해 축적을 이룩하는 자본주의 작동방식에 대해서는 은폐하는 효과를 가진다.
특히, 금융은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투자를 활성화시키면서 투자 정신과 공명한다. 금융화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우리가 자신에 대한 착취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와 함께 사회 공동의 위험을 관리하고 분배 과정에서의 불안정성을 완화시키는 국가의 역할이 퇴보하면서 그 역할을 금융상품이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금융상품을 통해 미래의 소득을 끌어와 소비활동을 하게 되면서 자본, 고용주는 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을 잉여가치로 전환하여 더 많이 착복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70쪽).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금융 상품을 이용하여 예방적 자산들을 구입한다. 부동산과 같은 물질적 자산, 그리고 대학 학위와 같은 비물질적 자산에 투자하여 혹여 모를 위험에 대비하고 안정적인 미래를 꿈꾼다. 우리는 마치 이러한 행위가 자기 스스로 결정한 것이며, 스스로를 미래에 전략적으로 대비하고 있다고 느낀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우리가 점한 위치, 그리고 불안정해져 가는 우리의 상황과는 달리 스스로를 주체적인 경제행위자, 투자자, 중산층으로 느끼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즉, 투자 주도적 자기 결정이다.
2장에서는 중산층 이데올로기와 사유재산 제도의 밀접한 관계를 분석한다.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축적과 투자의 열망과 다른 재산 축적과 투자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왜 우리가 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지를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말미암아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에 투자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은 도리어 재산의 가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저자는 1장에서 재산에 대한 투자가 오히려 우리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면, 2장에서 그는 재산에 투자라는 관념이 결부된 지점 즉, 재산은 과거의 투자로부터 나온 결과물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계기를 폭로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복리(well-being)에 대한 책임을 시민 자신의 투자로 돌리고, 이러한 투자가 맺는 결실의 지평을 그려냄으로써(96쪽) 중산층은 정치 및 경제 개혁의 주체로 호명되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분류되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체제 어느 곳에서든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 통화가치의 절하, 금융 위기, 불·호황의 격동 속에서 재산의 가치가 급격하게 변동하면서 재산에 대한 투자는 로맨틱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재산에 투자하는 일에 소홀해지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압력이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투자에 임하게 만드는 것이다(129쪽).
이어 3장에서는 교육, 공동체, 가족생활 등의 우리의 활동과 사회관계들이 어떻게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투자 대상으로 전환되는지를 분석한다. 2장에서는 중산층의 투자 이데올로기와 재산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설명하였으나 대개 그것은 물질적인 자원들에 한정되었다. 3장에서는 비물질적 자원들, 이른바 인적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사회관계들이 자산으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가족과 지역공동체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의 유대인 정착촌의 사례와 가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들을 토대로 인적 자본에 대한 열망이 중산층의 투자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잘 공명하는지 보여준다.
인적자본은 물질적 자본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상속 가능성의 여부를 확정 짓는 형태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능력주의 담론과 잘 조화되고, 무엇보다 개인의 생애주기를 따라 무한하게 요구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적자본에 투자하도록 더 강력하게 보챈다는 점이다(144-145쪽). 이는 자본 친화적인데, 기업의 입장에서는 현행 임금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이익을 보게 한다. 숙련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경쟁을 이용하여 총임금 수준을 낮게 유지할 수 있으며, 높은 생산성을 이용하여 개별 자본은 경쟁 자본에 비해 더 많은 이윤을 착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축적 과정 속에서 인적자본의 가치는 높은 생산성으로 말미암아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므로, 결국 노동시장에서 보상받고자 하는 인적자본의 가격은 애초에 우리가 투자한 것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인적자본의 투자가 치열해지면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점한 상대적인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이 투자하도록 요구된다. 마침내 인적 자본(human capital)에서 인간적인(humane)것은 사라지고 만다.
4장에서는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오도된 정치적 변화, 가치와 시민활동, 비판적 정치사상 등을 살펴보면서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저자는 이른바 아랍의 봄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시민운동을 이끈 것이 인적자본과 물질적 자본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던 중산층의 청년들이었다고 본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움직임들을 민주주의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을 꺼린다. 저자는 프랑스 시민혁명에서부터 아랍의 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중적 사회운동은 기존의 것보다는 진보적이지만, 불평등을 평등으로 전환시키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정립하는 수준에 한하여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변화는 중산층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 편,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노동자들은 임금 노동 외에는 생계수단 혹은 노동 수단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되면서 점차 소비를 위해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소비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로써 대중은 점차 그 정체성을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옮겨가게 된다. 복지국가는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라는 요구와 맞물려 있기는 하지만, 노동자를 소비자로 전환시켜 그것으로부터 수익성을 높이는 새로운 전략과 맥락이 닿아있다. 연기금, 사회보험 등 복지기구와 수단들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해체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의 저축금을 가지고 경제에 투자하여 잉여를 안정적으로 창출하고, 축적하는 방법이자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가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신자유주의로의 전환과 함께 해체되면서 각 개인에게로 책임과 비용이 부과되었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강화되는 재 가족화(re-familization)는 온갖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불안정한 미래에 대비하는데 모든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개인의 책무를 방증한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스라엘에서도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의 증가와 함께 청년들 사이에서 경쟁적인 투자로 재구조화되었다. 이스라엘 청년들도 한시라도 바삐 안정적인 자산을 얻어 불안정한 미래에서 모면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부동산, 인적자본과 같은 재원들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 세대는 자녀의 안정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그곳에 투자한다. 이렇게 구축된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결국,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경제적 인간관 즉 이기적 인간으로서의 관념을 실현시킨다. 모든 동맹과 연대는 자산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시적 수단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경쟁적 투자에 참여하여 불평등 자체를 해체하기보다는 상대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공고하게 재생산된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앞서 자신이 전개했던 분석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와는 달리 우리의 행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착취를 증가시키게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우리가 불안정성에 대비하여 세우는 장기 계획과 투자 활동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더 넓혀 자본주의 작동방식으로 넓혀 보면, 우리의 투자와 자산에 대한 열망은 우리가 의도한 바(안정성)와는 달리, 되려 우리를 착취 메커니즘에 종속시킨다. 투자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진취성과 독립성이라는 특성을 부여하지만, 우리가 진취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할수록, 자본주의 축적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종속되어 간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라 생각하며 투자 이데올로기에 부응할수록, 실제로 우리는 자본주의 축적의 메커니즘 속에 종속되어 우리를 착취하는 시스템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산층을 호명하는 투자 이데올로기에 암시된 자기 결정이라는 관념은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시스템에 종속되는 존재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운명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우리를 종속시키는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나갈 수 있는 역량이 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우리를 호도하는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힘이다. 이 책은 그러한 출발점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서 가장 놀랬던 것은 이 책에 저자가 사례로 소개한 다양한 사회의 모습이 마치 우리 사회의 세태를 보는 것처럼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열광적인 투자 트렌드와 똑 닮아 있다.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치환하는 분위기, 투자 열풍에 뛰어들기를 강요하는 미디어와 서적들,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안정한 상황까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듯 똑 닮지 않았는가. 그래서 다음의 글에서는 이 책의 개념과 분석 도구들을 빌려와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한국에서 유통되는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해볼까 한다. ..............to be continued